작은 체구이긴 하지만 풍물패의 맨 앞에 서서 꽹과리를 열심히 두드려댄다. 풍물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인다. 2일 오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381 - 4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인 고색동 도당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고색동 도당굿의 당제 날이기 때문이다.

 

넓지 않은 고색동 도당 안에 들어 온 풍물패들이 열심히 풍장을 울려댄다. 그 앞에선 상쇠 김현주(, 49. 오목천동)씨가 풍물패를 인솔해 도당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도당 앞에서 한 바탕 놀이판을 벌린다. 고색동 도당굿은 이렇게 풍물패와 굿을 주관하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회원들이 이끌어 간다.

 

 

작은 체구에 15년 된 당당한 쇠잽이

 

김현주씨는 어려서부터 춤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 춤을 잠시 중단을 했다고.

어려서부터 춤을 배웠어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추다가 춤을 중단했는데 지금은 다시 배우고 있죠. 결혼을 하고나서 고색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사물을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시작을 했죠. 아줌마들이 모여서 1년 만에 정월 대보름에 여는 고색동 줄다리기에 나가서 호남우도 농악으로 마당놀이를 했어요. 그런대 고색동에서 저희들을 보고 고색농악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고색농악대로 많은 행사에 동참하게 된 것이죠.”

 

20015월부터 고색동에 있는 새마을금고에서 연습을 하던 농악팀은 지금은 노인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마을에서 적극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연습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을 했으나, 지금은 일주일에 목요일을 뺀 나머지는 매일 연습을 한단다.

 

 

월요일은 기초반 연습이 있고요. 화요일은 중급반이 모여서 연습을 해요. 수요일은 북반이 연습을 하고 금요일은 전체적으로 다 모여서 연습을 하는데. 요즈음은 중보뜰 공원으로 나가서 야외에서 신나게 연습을 하죠. 그만큼 40여 명 정도의 단원들이 열심을 내고 있어요.”

 

쇠잽이와 천성적으로 맞아 떨어져

 

고색농악이 일 년에 담당하는 행사만 해도 적지 않단다. 정월 대보름에는 근동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줄다리기를 하고, 5월에는 어버이날 행사에서 판굿을 벌인다고. 그런가하면 매년 10월에 열리는 고색동 도당굿에서 한마탕 질펀하게 놀기도 하고,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고색동 체육대회에서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는 9일에 열리는 화성문화제 시민퍼레이드에 허수아비를 들고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동안 줄다리기도 하고 지난해는 모심기 노래를 하면서 퍼레이드도 해보았는데, 올해는 오목천동에서 허수아비 축제를 하잖아요. 그래서 허수아비를 들고 시민퍼레이드에 참가를 하려고요.”

 

이날 마당놀이에서는 상쇠노릇을 했지만 자신은 부쇠라고 한다. 상쇠를 담당하시는 분이 바쁜 일이 있어 이날만 상쇠를 맡은 것이라고. 여자가 쇠를 치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쇠를 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사물놀이반에 들어갔는데 저는 장구를 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장구는 이미 사람들이 다 차고 쇠잽이 자리가 비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꽹과리를 맡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더 잘된 일인 듯해요. 제 적성에도 딱 맞고요.”

 

대담을 하고 있는데 농악대 단원들이 찾는다. 그 소리를 듣고 곁에 있던 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 거드신다. “상쇠 찾는데 얼른 가봐. 저 사람은 재주가 좋아. 그리고 어떻게 늙지도 않아.”

 

태풍이 온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꽃의 한 종류인 태풍 나크리(NAKRI)는 최대풍속 초속 25m/s 이며 강풍반경이 350km인 중형태풍이다. 이 태풍이 오는 2일 오전 9시 서귀포 남서쪽 약 210km 부근 해상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또한 4일 오전에는 전북 군산 서쪽 부근 해상을 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태풍 나크리는 한반도 인근을 통과할 때 많은 비바람을 뿌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태풍으로 인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보존회 남부지부 사람들이다. 3() 오후 5시부터 수원천 남수문 앞 지동교에서 세월호희생자 극락왕생을 위한 위령굿을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1일 오후 지동교 난간에는 3일에 위령굿을 지동교에서 연다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일기예보에서는 3일에 태풍 나크리로 인하여 중부지방에 많은 비를 뿌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거기다가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기상태로 라면 도저히 지동교 위에서 위령굿을 펼칠 수가 없다.

 

 

위령굿 무슨 일이 있어도 합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텐데도 위령굿을 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가설무대라면 천정이 없는 무대인데 무슨 재주로 비가 오는데 공연을 한다고 한 것일까? 걱정이 앞서 3일 위령굿의 당주(굿을 주관하는 사람)인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씨에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태풍이 온다고 해서 약속한 위령굿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저희 도당굿보존회 남부지부에서 모든 사람들과 약속을 한 일입니다. 더구나 저희는 세월호 참사 49일째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가 바다위에서 49제를 여는 날도,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배가 뒤집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49제를 지내고 왔죠. 이 위령굿은 이제 그만 모든 영혼들을 안정시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그동안 세월호의 침체로 인해 많은 손해를 감수한 우리 상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자리입니다. 반드시 해야죠.”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라고 한다. 이날 위령굿을 위하여 지전춤과 도살풀이춤을 출 춤꾼들도 이미 섭외를 마친 상태이며, 위령굿에 동참할 보존회 회원들도 이미 다 정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날 굿상을 차리기 위한 제물로 이미 다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3일에 위령굿을 열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제 중단할 수는 없다고 한다. 비명에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자리인데, 만에 하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지동교 아래서 위령굿 열 것

 

그래도 비거 쏟아지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당사자들도 고민을 하는데 기획을 한 기획자들이 지동교 아래서 하면 충분하다라고 했단다. 지동교 아래는 상당이 넓은 공간이 있고,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고 해도 비를 맞지 않고 할 수가 있다. 거기다가 조명까지 준비를 했다고 한다. 오히려 더 좋은 자리가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웃는다.

 

지동교 아래서 하자는 소리를 듣고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약속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관객이 하나도 없어도 무관합니다. 저희들이 희생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마련한 자리니까요. 그날 비가 오지 않아도 저희들은 지동교 아래 판을 벌일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 위령굿을 열겠다는 마음 때문인가? 태풍이 온다는데도 판을 벌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즐거워한다. 이미 그 마음만으로도 위령굿은 하늘을 감응시킨 것인가 보다.

아무래도 일반인들하고는 달리 저희들은 직성이 강하다고 하죠.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마 두 사람이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면 더 심하게 다툴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부부가 모두 신을 모시고 있다. 그것도 한 집에서 한 곳의 전안(신령을 모셔 놓은 신당)을 섬긴다. 이럴 경우 대개는 심하게 다투기가 일쑤라고 한다. 심지어는 모녀사이에도 전안을 차지하려는 신들 간의 싸움이 치열하다. 그런 시기와 다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20년 세월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세상의 많은 아픔을 함께 하고 살았기 때문인가 보다.

 

막말로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해서 서로 헤어졌다고 하면, 저 사람보다 더 잘나고 착한 사람을 만나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사실 신들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사람들의 구실에 지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아야죠.”

 

21일 오후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97-139 ‘일월신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곳. 이 집은 부부가 모두 신을 모시는 신제자이다. 막다른 골목길의 이층집 안에는 문 앞에서부터 각종 기물들이 눈이 띤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지 않은 실내에 빽빽하게 신령의 물품들이 차 있다.

 

 

부부가 신내림을 한지 벌써 20

 

부부는 비슷한 시기에 신내림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인 이용수는 올해 53세이다. 신내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났다. 부인인 김상희는 46세로 21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나서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문제는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저 사람이 많이 이해를 해주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런 이해가 없으면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고요.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배나 더 어렵습니다. 그저 한 발 물러나 늘 양보를 하는 길만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죠.”

 

그저 그런 남편이 고마워서 무슨 일을 하던지 두 사람이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서 살다가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3년 정도 되었다. 지금 자리에 오게 된 것도 부인인 김상희의 꿈에 이 집을 현몽을 했다는 것이다.

 

원래 저희 같은 사람들은 막다른 집을 들어가지 않잖아요. 길이 막힌다고 헤서요. 그런데 집 사람이 이사 오기 전에 미리 이 집을 보았다고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집으로 들어왔어요. 비좁아서 많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고 살아야죠.”

 

 

지독한 신병에 10세부터 귀신을 보았다는 김상희

 

남들은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믿지 않겠지만 저는 10살부터 귀신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이 다 맞고요. 이미 그때부터 신병이 시작된 것이죠. 17살부터는 벽에다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바라춤을 춘다고 하기도 하고, 휴지를 들고 살풀이를 춘다고도 했어요. 그러다가 24살에 어머니 재수굿을 해주다가 신굿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죠.“

 

10세에 시작한 신병은 이미 14년이란 긴 시간을 괴롭혔다. 해마다 다리를 다치는가 하면 인대가 늘어나 걷기조차 힘들었다, 육신적인 신병과 함께 금전적인 신병이 온 것이다. 그때는 이미 깊어 질대로 깊어진 신병으로 인해 동자들이 눈에 보여 사탕을 사다놓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보여 자고 가라고도 하는 등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수도 없이 벌렸다.

 

 

잠옷 바람으로 나가서 한 걸립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내림굿을 할 날짜를 잡았는데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이 없잖아요. 당시는 이태원에 살았는데 제가 화장을 하고 잠옷을 입고 길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점을 보아주고 걸립을 한 것이죠. 그렇게 돈을 모아 수락산에서 내림굿을 받았어요.”

 

내림굿을 하고 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야 신령을 모셨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다치고 아프던 다리가 싹 나은 것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간판도 달지 않고 13년간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상당한 재물도 모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몇 년 쉬었어요. 너무 피곤하기도 하지만, 산다는 것이 버겁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수원으로 내려와 경기도당굿 이수자이신 승경숙 선생을 만났죠. 선생님의 굿을 보고 첫눈에 나도 이 길을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부부가 전수생으로 등록을 했다. 이 두 사람은 경기도당굿보존회 남부지부 공식 1기생으로 전수자 등록이 되었다. 앞으로 열심히 학습을 해 도당굿을 보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이용수, 김상희 부부. 아무쪼록 이 집 대문 앞에 내 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전수자라는 명호답게 지역의 문화를 지켜갈 수 있는 동량이기를 기대한다.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 번지에 소재한 영동 거북산당. 이 도당은 18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역사가 200여 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한다. 영동 거북산당은 화성을 축성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거북산당이 자리한 앞쪽으로는 낮으막한 ‘거북산’이라는 산이 있어, 그 명칭을 거북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산당은 처음에는 현 구천동의 마을 제당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후에는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도당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거북산당은 주변 상권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화성 축성을 위해 팔도에서 모여 든 수많은 노역자들로 인해 장시가 개설이 되고 난 후. 그때부터 팔달문 앞에 형성된 장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인청의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지켜 온 거북산당

 

영동 거북산당은 옛날에는 세습무인 화랭이에 의해 굿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재인청 도대방을 역임했던 이종하의 삼남인 이용우 선생이, 생존 시 거북산당 도당굿을 주관하였다. 이용우 선생 일가는 현 오산시 부산동(당시 수원 오산리)에 거주하였으며, 경기도 지역의 많은 도당굿을 주관해 오기도 했다.

 

현재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기와로 조성된 겨북산당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거북산당은 과거에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 만든 ‘터주가리당’이었다고 한다. 1935년(乙亥年)에는 터주가리 당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당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거북산당 주변에는 기와집과 판잣집들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이 팔달문 앞 장시의 외곽에 있던 당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터주가리 당을 당시 인계동에 거주하던 이씨 만신이 관청의 도움을 받고, 개인이 사비를 들여서 거북산당을 축조하고 그 안에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 그리고 대왕님의 탱화를 모셨다고 한다.

 

그 탱화는 현재 거북산당 안에 모셔진 그림과 동일한 형태이다. 그 뒤 1994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수원시청의 지원을 받아 당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로 입혀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당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당 앞에 있었다는 연못이 메어지고, 그 자리에는 앞 건물에서 가건물을 내 짓는 바람에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당의 형태가 변한 거북산당은 세습무인 화랭이들이 주관하던 것을, 이용우 선생의 제자인 강신무로 전 경기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으로 전해졌다. 보유자 오수복의 별세 이후 지금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회원들이 도당굿을 맡아서 하고 있다.

 

 

영동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건립된 이유는?

 

영동 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축조된 이유를 보면 화성의 축성과 무관하지 않다. 화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노역자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팔달문밖에 장시가 서게 되면서, 상인들 을 주축으로 상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도당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시장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시장에서 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없어도 당제는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의 명칭이 거북산당으로 불리는 것은 원래 이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 인근의 구천동과 가까우며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라서 풍수적으로 불을 제압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거북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 거북산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도당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당

 

경기도의 도당은 당집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도당신을 섬기는데, 신위는 위패를 모시거나 무신도를 모셔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동 거북산당 안에는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대왕님(염라대왕)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지내오던 것이다.

 

이 도당굿은 시장의 번영과 상인의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공동체적인 삶의 필요로 창출된 굿이다. 그러나 1990년 초에 이르러서는 영동시장 번영회에서 별도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 보존회원들에 의해서 굿이 진행되지만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해동은 대한국이요 경기도는 삼십칠관 마련하여

광화는 일품이요 광주는 이품

수원은 정삼품이요 안산은 군수수령 내명은 부사또라

 

10월 8일 오후 7시, 오산시 마등산 자락에 자리한 역말굿당 한 편에서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장단을 치면서 부정무가를 부르고 있다. 경기도당굿 중, 굿을 시작하기 전에 거리부정에서 부르는 무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 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굿이다. 도당굿은 매년 또는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 초나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현재의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나,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일씩 거행이 되던 경기도당굿

 

대개 마을의 도당굿은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에 끝이 난다.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부지역에서는 3일간이나 굿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굿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당굿을 영위하는 무격들은 집안으로 대를 이어 기능을 연마하고, 음악과 무용에 뛰어난 세습무들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남자무당으로, 줄을 타면서 재담을 늘어놓거나 재주를 보이면서 굿을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예전에는 도당굿판에는 기생들의 소리와 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기, 예능적으로 뛰어난 도당굿의 제차

 

경기도당굿은 굿을 하기 전날 당주 집에서 벌이는 ‘당주굿’으로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을 친다. 요즈음에는 대개 강신무인 여무들이 주로 굿을 하기 때문에, 거리부정도 여무들이 많이 맡아서 하는 편이다.

 

굿당에 도착하면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를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을 벌일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가리 앞으로 가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되돌아오는 ‘도당모시기’,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굿당에서 군웅마나님께 대취타연주를 올리는 ‘장문잡기’ 등으로 순서가 진행이 된다.

 

그런 다음으로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알아보는 ‘시루말’을 한다. 시루말은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 가로 확인한다. 이어서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과 도당조상, 본향조상을 모셔서 집안의 평안과 자손번창을 축원하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경기도당굿에서만 볼 수 있는 화랭이와 무녀가 함께 군웅상을 마주하고 진행하는 쌍군웅춤인 ‘군웅굿’, 날이 밝아 도당신을 도당으로 다시 좌정시키고 돌아오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화랭이가 놀며 동네축원과 영산수비를 풀어주는 ‘중굿’,에 이어, 굿판에 따라든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은 끝난다.

 

 

 

 

오산은 경기도당굿의 남다른 지역

 

경기도당굿은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산과 경기도당굿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것은 오산 부산리(현 부산동)에 재인청 3대 대도방의 가문인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대를 이어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오산 부산동에는 도당굿을 펼치던 당집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용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마등산 역말 굿당이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경기도당굿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여, 57세)은

 

“그동안 경기도당굿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굿거리 제차임에도 불구하고, 전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까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당굿을 전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죠. 3년 전부터 1기생 17명을 데리고 시작한 도당굿의 전수가, 올해로 3기생을 맞았습니다.”

 

 

 

 

일일이 소리를 하고 장단을 치는 법 등을 알려주는 승경숙은, 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에게서 춤과 소리를, 전수조교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방돌근 선생에게서는 장단 등을 학습했다.

 

“오산은 도당굿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란 생각입니다. 3대 째 재인청의 도대방들이 직접 도당굿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제가 배운 그대로 많은 전수자들에게 전승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도당굿이 옛 모습대로 활성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죠.”

 

열심을 내어 도당굿의 소리와 춤을 배우고 있는 전수생들. 언젠가는 저들이 도당굿의 굿판에 서서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당굿 제차를 해낼 것이다. 그래서 오산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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