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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