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백성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구조물

 

수원화성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현재의 장소로 옮긴 후 축성한 성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천봉하고 난 후 쌓은 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요, 후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축성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을 이곳에 주둔시켜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요새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20만 덩이의 석재,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6천주의 목재, 1845명의 장인이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시용하여 1794년부터 28개월 만에 완공한 자연친화적인 성이다. 수원화성은 성을 축성하면서 각 공사구간별로 책임을 맡은 모든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제작하여 성벽에 부착함으로써, 자신이 축성한 곳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누가 그곳을 책임지고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화성 시설물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어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시설물 중 연도와 굴뚝이 서 있는 곳이 있거나, 곳곳에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19일이 우수인데 16일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눈보라가 치는 날 수원화성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수문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지휘소 겸 인근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달문과 남공심돈·남암문(두 곳은 현재 유실되었다) 남수문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지만 남수문에서 동남각루를 항해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치는 중에도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각루는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함께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를 돌아보니 연도와 굴뚝이 보인다. 연도와 굴뚝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다. 동남각루를 돌아 뒤편으로 가니 아궁이가 있다. 수원천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울 것을 염려해 온돌방을 놓은 것이다. 이런 온돌방은 서북각루에도 굴뚝과 온돌방이 보인다. 수원화성의 구조물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들이 눈에 띤다.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동남각루를 지나 봉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보라가 더 심하게 친다. 며칠 안 있으면 우수인데 꽃샘추위인 듯하다. 항상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닥친다. 동삼치를 지나 공사 중인 동이포루를 지난다. 그리고 봉돈을 앞에 두고 밖에서 인을 들여다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 봉돈 안에도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창문은 까치살창을 내어 환기를 도왔다.

 

·포루 등을 거쳐 창룡문을 돌아본 후 동북노대를 지난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곳으로 동북노대는 동장대와 동북공심도 가까이에,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소재한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복노대를 거쳐 관람이 중지된 동북공심돈에 도착했다.

 

동장대인 연무대를 돌아본 후 동암문을 지나 높은 곳에서 군사들이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동복포루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기 때문인가?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동복포루 역시 높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인 동북포루는 정자와 같은 형태로 이층으로 올리고 아래편에는 군사들이 눈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이 공간은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비밀공간이기도 하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1794(정조 18) 10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역시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평소 같으면 꼼꼼히 돌아보아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인데, 눈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바람도 점점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거세진다. 더 이상 돌아본다는 것이 어려울 듯하다.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본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화성의 시설물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의 시설물들. 그저 겉으로 보고 걷기보다는 그 시설물에 얽힌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어보자. 정조대왕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기 때문에 그 시설물들이 한결 돋보이는 듯하다.

 

지동길목

홀로 핀 봉숭아 꽃 너무 붉다

풍선처럼 팽팽해진 탱글한 씨앗자루

꼬투리 투툭, 터지며

날아든 파편

내 가슴 한 켠에 박혀

새록새록 이듬해 핀다.

 

 

지난 1026일 오후 지동 벽화골목에 시인의 벽이 마련되었다. 수원시인협회(회장 김우영)가 주관한 이 행사에는 고은 시인을 비롯해, 지동에 거주하는 아동문학가 윤수천 선생, 수많은 시인 제자들을 배출한 원로시인인 유선 선생 등 많은 시인들이 함께 자리를 했었다. 시인의 벽은 시립지동어린이집 건너편 벽에 마련이 되었다.

 

 

눈 오는 날 벽에 시를 입히는 시인들

 

14일 오후, 이 지동 벽화 길에 또 다시 10여명의 시인들이 찾아들었다. 가는 눈이 점차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지만, 벽에 자신의 글을 쓰는 시인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흡사 자신들이 마치 눈인 듯 벽에 시를 입힌다. 위 시는 정겸 시인의 봉숭아 꽃이라는 시이다. 눈발이 점차 거세지면서 바람까지 분다. 1차 시인의 벽을 조성할 때 미처 찾아오지 못했던 시인들이다.

 

시인 윤민희는 지천명이라는 시를 적었다.

 

절반은 내가 가고

절반은 네가 와서

손잡고 갔으면 좋겠어

 

절반은 앞에서

절반은 뒤에서

나란히 갔으면 좋겠어

 

자정이 바라보는 정오

춘분 추분이 바라보는 해와 달

좌우 날개로 나는 새들처럼

중용을 잃지 않는

지천명이었으면 좋겠어

 

날이 춥다. 그 추운 날을 녹이는 것이 바로 시인의 벽이요 지동 벽화 시골목이다. 한참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시를 쓰고 있는데 골목의 한 집 대문이 열린다. 지동 창룡문로 60-3의 주소를 가진 집이다. 직접 커피를 끓여 시인들에게 대접을 한다. 집 주인과 따님이 내어주는 커피 한 잔에 차갑던 몸이 녹는다.

 

눈이 오는 날 지동을 찾아 시를 적는 시인들에게 따듯한 차 한 잔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 마음 하나가 찬 눈이 쌓인 감나무 가지에 달린 까치밥과 같이 여유롭다. 그래서 지동은 살가운 동네라고들 한다. 인정이 넘치는 지동 벽화골목. 그곳에 마련된 시인의 벽과 골목. 또 하나의 지동 명물이 되었다. 주말이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포토죤이 되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블록 담장위에 쌓인 눈에, 처마에 달린 마가목 씨앗 열매가 더 붉기만 하다. 정명희는 죽어서도 상사화가 되고 싶다고 풀씨와 자동차라는 시를 적었다.

 

죽어서도 상사화가 되고 싶은 마음

멀지 않은 그길

내달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이른 끔 하나 떨어트렸다

차마 내 뿜을 수 없는 열기

더 뜨거운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가 되었다

나뭇잎이 될게

꽃잎은 아주 많이

그래서 씨앗으로 바퀴를 만드는거야

어느 무공해의 도시

오랜 통증이 사라진다.

 

 

하루에 1.8개의 글. 참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11일부터 1130일까지 거의 날마다 2개씩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자료를 보거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쓴 글이 아니기에 더욱 더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나 기타 사람들 간의 인터뷰,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라는 것은 절대로 집안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현장을 나가 문화재를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에 흠뻑 젖어도 보고, 눈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11달 만에 쓴 글이 자그마치 654개나 된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9월 한 달 5kg이 빠졌다.

 

9월 한 달 동안 수원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렸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수원시와 ICLE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유엔 HABITAT(유엔 인간주거계획) 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의 차 없는 거리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미래에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난 후, 우리의 자손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인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였다. 9월 한 달 동안 행궁동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살았다. 9월은 연일 살인더위였다.

 

 생태교통 한 달동안 5kg이 줄었다. 80개의 기사를 썼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거리에서 한 달간, 하루에도 몇 군데씩을 현장 취재를 하고 다녔다. 한 달간 쓴 기사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그동안 살이 무려 5kg이나 빠졌으니, 흘린 땀만 해도 어지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 년간의 활동을 뒤돌아보다

 

201311일부터 1130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역시 나는 문화재 전문 블로거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러 나가기 전날이면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흡사 소풍날을 앞둔 아이처럼.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11개월 동안 답사를 한 날짜를 계산해보니 58일 정도가 된다. 58일 동안 답사로 소요된 경비만도 천여만 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길거리에 돈을 뿌렸다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발 목까지 눈이 쌓여도 그 핑계로 답사를 멈춘 적은 없다

 


지만 문화재 답사는 나에게는 내 일생을 걸고 하는 나만의 생활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자료로 만들어 둔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이용해 좋은 연작 자료집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벌어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천여만 원을 투자해서 나에게 돌아 온 수입이란 고작 300여만 원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투자한 금액보다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방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성한 글의 90%는 모두 현장에서 취재를 한 기사이다


 

앞으로도 내 바람 따라 걷는 길은 영원할 것

 

눈이 온다고 해서 답사를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정취를 풍기는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늘 나는 스스로를 바람 같은 남자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길을 나서 문화재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 년 동안 엄청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그보다 몇배 깂진 지료를 얻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나라도 없을 것만 같다.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산속이나 들판 등에 자리를 한 문화재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훼파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 서 있는 것도 결국 나 하나만이라도 그 문화재를 눈 부릅뜨고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이다.

 

2014, 2015, 혹은 그 이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문화재 답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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