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위치한 각연사의 주위로는 보배산, 칠보산 등이 둘러쌓고 있다. 각연사의 일주문에는 '보배산 각연사'라고 적혀있다. 신라 법흥왕 때인 515년에 유일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각연사는, 그 역사가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이다. 그만한 절이 이 곳 산중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각연사는 어떤 모습일까?

괴강삼거리에서 올갱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각연사로 행했다. 도로에서 각연사로 향해 마을길로 접어들자 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눈은 치웠다고 하나, 여기저기 얼음이 얼어 미끄럽다, 거기다가 앞에서 차가 나오는 바람에 100여m를 후진을 해야만 했다.


절을 찾을 때도, 뒤로 할 때도 몇 번이고 후진을 해야 하는 길. 중간 중간 차가 비켜설 수 있도록 길을 내주면 좋으련만. 이 산중에 있는 고찰을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찾는 사람들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자칫 초보운전이라도 되는 날은 그냥 울고 싶을 것이다.

까마귀와 연못에 얽힌 전설

각연사에는 전설이 전한다, 어느 절이나 그러하지만, 천년 넘는 고찰에는 그럴듯한 전설 한 가지는 전하기 마련이다. '각연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이러한 전설과 연결이 된다.


각연사 일주문과 경내에 있는 석물.좌대인 듯하다. 각연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유일대사가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에 있는 절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절을 짓고 있는 곳으로 까마귀 떼들이 날아들었다. 이 까마귀 떼는 절을 짓는 현장에 있는 나무토막과 대패 밥 등을 들고 어디론가 날아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는 기이한 까마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날 까마귀 떼를 쫒아갔다. 그랬더니 현재 각연사의 자리에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물 위에 나뭇가지와 대배 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가 연못 안을 들여다보니 석불이 있고, 그곳에서 광채가 일었다.

유일대사는 깨달음을 얻어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각연(覺淵)'이라 하였단다. 지금 각연사의 비로전이 선 자리가 바로 그 연못이 있던 저리이고, 비로전 안에 모신 보물 제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연못 속에 있던 석불이라는 것이다.」


대웅전과 돌계단. 장대석에서 각연사가 고찰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재위기간이 514년~540년이다. 이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이 신라말기의 작품이라면 년대 차이가 많이 난다. 하지만 전설이란 전해지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이 비로전과 각연사라는 절의 명칭이 그런 연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화 삼아 알 수 있다면, 그 또한 귀가 솔깃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는지.

뛰어난 경계에 자리한 각연사

각연사를 들어가는 길은 4km나 된다. 좁은 길이 계곡을 끼고, 숲이 우거진 길을 올라간다. 말은 오른다고 하지만, 평지나 다름없다. 걸어서가도 30 ~ 40분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봄철에는 주변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봄꽃의 향에 취해 걸어볼 만한 길이다. 아니, 이 길은 걸어야 각연사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을 듯하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과 비로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덤벙주초


일주문을 지나 10여분을 걸어 경내로 들어선다. 중앙에 낮은 구릉을 뒤로하고 대웅전이 자리한다. 대웅전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정면 세 칸, 축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집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 혹은, 고려 초의 통일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그동안 각연사의 대웅전은 몇 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융경 년간(1567~1572), 순치 년간(1644~1661), 강희 년간(1662~1722)에 보수를 하였고, 영조 44년인 1768년에 중건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1979년에 보수를 하였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비로전

각연사라는 명칭을 갖게 했다는 비로전. 전설에 의하면 이 비로전이 있는 곳이 연못이었다는 것이다. 비로전은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진 이 비로전은, 인조 26년인 1648년, 효종 6년인 1655년, 광무 3년인 1899년, 그리고 1926년에 중수하였다.

초석은 신라 때 사용하던 자연석 위에 원형으로 깎아 도드라진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비로전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그 뛰어난 조각 솜씨에 압도당한다. 앞에가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하다.

각연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두 가지 문화재인 보물 제1370호 각연사 통일대사 부도와,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으나, 아직은 길이 녹지를 않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경내를 돌아보면 기단을 쌓은 장대석이나 주추 등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적당히 자리를 잡은 전각들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꽃이 피는 봄에 다시 한 번 각연사를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보개산을 뒤로 한다

어느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답사 다니시면 재미있겠어요. 전국 어디나 다 갈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문화재도 보고”

틀린 말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사실 답사라는 것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나처럼 ‘진한 역마살’을 갖고 있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답사로 풀어내는 것이 제격이기도 하다.

2월 5일, 포천시 소흘읍 산 64번지 노고산에 있는 포천시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성지’를 찾아 나선 길. 고모리 저수지 공지에서는 대보름 축제를 하느라 시끄럽다.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고모리산성이 어디 쯤 있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저 위”라는 대답이다. 시골 분들에게 ‘바로 저기’라는 말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을 때가 많다.



바로 저기가 눈길 한 시간을 올라

고모리산성지는 고모산, 혹은 노고산이라고 부르는, 해발 380m의 산 정상부를 에워 쌓고 있는 토축산성이다. 두 개의 계곡을 끼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라고 하나, 현재는 대부분 붕괴되어 성벽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 전체길이는 822m라고 하지만, 남아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가파라 줄을 잡고 올라야 할 정도이다. 더구나 눈길 산행은 정말 힘들다. 산 위에 오르면 소흘읍이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요충지이다.

‘바로 저기’라는 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용이하지가 않았다. 몇 번을 물어서 산으로 오르는 길. 눈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등산로라고 하지만,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산봉우리 부분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것이 정상인가 보다 생각하면 또 산이 나온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 높지 않은 산을 오르는 길이 참 멀게만 느껴진다.

겨우 산 정상에 올랐다. 마침 이 산성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산 위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물도 준비하지 않고 올라간 산행. 숨이 턱에 찬다. 물 한잔을 마시고나서 성이 어디냐고 물었다. 성이라고 알려주기는 하는데,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이곳이 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없을 만큼 표시가 나질 않는다.



산행에서 만난 지역문화를 연구하시는 분들. 서 있는 곳이 바로 토축으로 쌓은 성곽이다

더구나 눈이 쌓여있고, 잡풀더미가 우거져 성의 흔적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나마 봄에 눈이 녹으면 일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부분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보이지가 않지만, 눈이 녹으면 일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한 성곽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백제 때 쌓은 성, 그러나 고구려가 더 오래 사용 해

원래 고모리산성은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는 세력이나, 남에서 북으로 진출하려는 세력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요충지인 셈이다. 산 정상에서 만난 이 지역의 성을 연구한다는 유대근씨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기란 더욱 어렵다. 자칫 미끄러지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이 고모리산성은 아마 100여명 정도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성이라기 보다는 주변을 감시하는 초병들이 묵는 성곽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백제 때 산성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을 보면 고구려의 것들입니다. 아마도 중간에 고구려에게 성을 빼앗겨, 고구려가 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라고 한다.

눈길 1시간여를 걸어올라 찾아간 고모리산성. 비록 성곽은 유실이 되어 정확한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그 위에 오르니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요충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산성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 짐승들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를 때보다 몇 배는 더 고생을 하고 내려온 비탈길. 겨울의 답사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길에서도 저만큼 커다란 석등 한 기가 보인다. 석등의 전체 높이가 5.18m나 되는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7에 소재한, 보물 267호인 용암리 석등. 그 규모만큼이나 대단한 크기에 뛰어난 조각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용암리 석등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기나 아름답기로 손 꼽힐만한 대단한 석조미술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임실군 신평면 소재지에서 좌측 운암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길가에 보물인 용암리 석등이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석등은 아마도 예전에 사지가 있었던 곳 같다. 축대 위에는 몸돌은 사라진 채 덮개석만 남은 탑이 남아있고, 축대 위로 오르는 돌계단의 한편 난간과, 돌계단의 밑 부분도 예전의 석재를 이용해 복원을 해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용암리 석등이 서 있다.


뛰어난 조각이 돋보이는 석등

이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곳을 몇 번이고 들려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버스를 이용해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한 가지 문화재를 보기 위해 하루를 소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결정이다. 마침 겨울철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여 길을 나섰다. 이 석등을 보는 순간 어렵게 나선 답사길이지만, 이것 하나만 갖고도 아깝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석등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용암리 석등. 크기가 크면서도 절대로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앞에서면 6m에 가까운 이 큰 석조미술품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발목까지 눈이 빠지는 것도 모른 체, 석등 가까이 다가간다. 눈밭에는 발자국이 찍히면서 소리를 내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길 틈이 없다.
        


귀꽃을 아름답게 장신한 덮개석 밑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놓고, 그 밑으로는 3단의 받침돌로 구성이 되었다. 이 용암리 석등은 아래 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는 커다란 꽃 장식을 두었다. 위에는 구름을 새겨 넣었으며, 간주석인 가운데 기둥은 장고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연꽃을 새긴 마디를 둘렀다. 이와 같은 모양의 석등은 보물 제35호인 남원 실상사 석등 등에서도 보이는 제작기법이다.

보면 볼 수록 석등에 빠져들다.

한참이나 석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과연 이것이 장비조차 변변치 않던 통일신라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낸 조형물일까? 많은 석등을 보앗지만,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석등은 흔하지가 않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창을 내었다. 이러한 조형기법은 실상사 석등이나 보물 제111호인 개선사지 석등 등에서 보이는 제작기법이다.



화사석의 위에 올린 지붕돌은 경사가 급한편이다. 그 각 모서리에는 커다란 귀꽃을 조각하였는데, 그 귀꽃의 아름다움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덮개석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이 놓여있다. 화사석에는 별다른 조각은 하지 않았으나, 8면에 낸 창이 시원하게 보인다. 세상을 밝히는데 있어, 좀 더 밝은 빛을 발하도록 한 마음이 엿보인다.

석등 주변을 떠나지 못하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용암리 석등이다. 이 석등이 서 있는 곳은 '진구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구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편이다. 다만 고승 보덕화상에게는 법륜이 높은 11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적멸과 의융 2인이 임실에 진구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용암리 석등'은 2010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명칭을 변경할 때 '진구사지 석등'으로 바꾸었다. 지붕에 하얀 눈을고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 도대체 그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은 석등을 조형을 할 수가 있었을까?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것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이렇게 조각을 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디 한 곳 부족함이 없다. 어디 한 곳 더 지나치지도 않는다. 당연히 그 자리에 그런 조각을 해 놓아야 할 것같은 자리에,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돌로만든 조형물이지만 딱딱하지가 않다. 그저 흙으로 잘 빚어놓은 것처럼 부드러움이 있다. 하얀 눈밭에 서 있는 석등의 모습이, 마치 이곳이 천상인양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길을 떠나야 하지만,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아마도 이대로 이 석등 곁에서서 못난 돌미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힐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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