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을 찾아가면 대웅전이나 석불, 혹은 부도 탑 앞 등에서 있는 석등을 볼 수가 있다. 이 등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깨달음을 주어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석등은 실제로 불을 켜는 경우가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이나 탑 등의 앞에 세우는 장식적인 축조물로 변하고 말았다. 석등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대석과 중간인 석주,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을 얻는 형태가 석등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관촉사 경내에 자리한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이 된 석등이다.


거대한 석등 은진미륵과 어우러져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앞에 서 있는 석등은 그 높이가 5,45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 다음으로 거대 석등으로 본다. 이 석등은 석조미륵입상이 세워진 해인,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 석등은 4각의 석등으로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관촉사 석등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화사석이 2층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창이 넓고 기둥이 가늘어 조금은 불안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 둥근 기둥으로 조형을 한 기둥은 굵고 조금은 투박하게 제작이 되었으며, 위아래 양끝에는 두 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 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여덟 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뛰어난 조각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꽃이 조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석등으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귀꽃이 아름다운 지붕돌

화사석이 2층으로 이루어진 관촉사 석등은 화사석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지붕돌의 이랫부분은 다듬지를 않은 듯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가볍게 올린 듯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하게 귀꽃을 조각하여 생명이 없는 찬 돌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화사석 위에 올린 머릿돌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이렇게 거대한 석등을 조각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많은 공을 들인 관촉사 석등. 고려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석등은 벌써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오랜 시간을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저리도 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저리 서 있을지, 오늘 그 석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논산 관촉사에는 보물 제218호인 거대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20m 정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배례석은, 우리나라의 석조물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문화재다.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배례석에서 예를 올린 것은 아니고, 이 배례석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뒤편에 석탑이 1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미륵전이 있다.


논산 관촉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인 배례석(위)와 석문(아래)

뛰어난 조각술이 엿보이는 관촉사 배례석

관촉사 미륵전 뒤편에 놓인 배려석은 장방형의 대석이다. 바닥에서 2단으로 직각고임을 해서 올려놓고, 그 위의 면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안상은 고려 때의 석조물에서 흔히 보이는 문양으로, 전면에는 3개를 새겨 넣고 단면에는 2개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버섯구름 모양의 문양을 돋을새김하고, 여울진 모양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중앙에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 연꽃이 양쪽의 것보다 약 3㎝ 정도가 크며, 연꽃잎은 모두 8잎으로 연꽃 한 잎의 중앙부가 갈라져 두개의 잎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배례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한 석문(石門)

미륵전을 조금 비켜선 계단위에는 돌로 만든 석문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석조물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이다. 석문의 한쪽 기둥에는 ‘해탈문’이라고 새겨 놓았다. 문 입구에는 넓이가 48cm 정도의 돌기둥을 양편에 세우고, 윗면 천정에는 길게 장대석으로 잘 다듬은 돌을 다섯 장 올려놓았다.

전체적인 석문의 모습은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터널과 같은 형태로 꾸며졌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문의 양편에는, 성문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석벽으로 둘러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예이다. 이 석문은 석조미륵입상과 같은 연대에 제작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둥 좌측에는 해탈문이라 적었다(맨위) 석문 안으로 은진미륵이 보인다. 그리고 문에 연결한 석벽괌(위에서 세 번째) 바위와 어우러진 석문(아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2기의 희귀한 석조물이 있어 남다른 곳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관촉사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재로 찾아드는 이들을 들뜨게 만든다.

데이터베이스[database]란 일반적으로 ‘DB’라고 약자로 많이 적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자료 기지 또는 자료틀. 보통 DB라고 약칭한다. 동시에 복수의 적용 업무를 지원할 수 있도록 복수 이용자의 요구에 호응해서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저장, 공급하기 위해 일정한 구조에 따라서 편성된 데이터의 집합이다. 기업이나 조직체의 활동에 필요 불가결한 자원이 되는 정보에 대한 다양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를 수집, 관리하여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다음 백과사전)

데이터베이스란 언제나 그 자료에 대한 가장 최근 의 것, 혹은 가장 정확한 것이라야 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관계부처에서 제대로 된 사진하나를 데이터로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이야기일까?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검색. 강경 미내다리

데이터베이스는 관리가 잘 되고 있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를 답사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다음 뷰에 글을 송고한다. 문화재라는 특성상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화와 관련된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찾아보는 자료는 문화재청, 해당 지자체 사이트, 그리고 현장의 안내판 등이다. 그리고 혹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운이 좋을 때는 근처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고 챙겨온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소개나 해당 지자체의 관련 사이트, 그리도 현장의 안내판 등도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속한다. 그런데 다니면서 보면, 잘못된 자료가 너무 많다는데 대해 놀랍기만 하다. 적어도 한 나라의 문화재를 설명하는 자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다니면서 잘못 된 안내판 등을 수도 없이 관련 단체에 전화를 해 시정을 요구하고는 했다. 그동안 꽤 많은 자료들을 고치기도 했지만, 매번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도 번거롭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가끔 본의 아니게 말투가 거칠어지기도 하고, 말끝이 올라가기도 하는 일이 있다 보니 그도 반가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소개된 미내다리 사진

최고기관인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 관리 꼼꼼히 살펴야

오늘 강경 미내다리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청 ‘문화유산지식’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미내다리의 설명을 보았다. 물론 미내다리의 설명으로 본다면 가장 신빙성 있는 곳이 문화재청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유산을 총괄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유산이라고 해서 문화재청에서 일일이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보나 보물, 중요민속자료, 중요무형문화재, 사적, 천연기념물 등 그중 가치가 중요한 것은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지방의 유무형문화재나 기념물 등은 광역자치단체에서 관리를 한다.

그렇다고 지자체에서 관리를 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란 그것이 어떤 분류에 속해있던지 모두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내다리 자료를 보니 사진이 이상하다.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사진은 복원이 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논산시청을 들어가 보았다. 현재의 미내다리 모습이다.

논산시청의 미내다리에 소개된 사진

그렇다면 문화재청은 이 미내다리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놓아두어야만 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 자료도 소중하겠지만 복원 전의 모습과 복원 후의 모습이 있었다면, 더 훌륭한 데이터베이스였을 것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최고 기관의 데이터베이스가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면,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가도 좋을만한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보고 가는 곳이다. 더욱 요즈음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전국을 수많은 블로거들이 찾아다니면서 답사하고 글을 올리고 있다. 꼭 블로거가 아니라고 해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재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청도 항상 새로운 모습의 자료를 구축하고 그것을 올려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온전한 데이터베이스의 관리라는 생각이다.

논산에서 강경읍으로 가다가 보면 중간에 채운면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강경읍으로 들어가기 전 채운교를 비켜 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다리가 있는데, 바로 강경 미내다리이다. 이 미내다리는 강경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미내다리는 조선 영조 7년인 1731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전한다. 일명 ‘조암교(潮岩橋)’라로도 불렀던 미내다리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명이 미내천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여지승람』에는 ‘미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조암교>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강경포구가 있던 곳으로 조수의 왕래가 심했으며, 수많은 배들이 이 미내천을 이용해 교역을 감행하였다.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니던 강경포구

강경포구는 한 때는 우리나라 상권을 대표하는 포구의 장 중 한곳이었다. 포구에는 객주집들이 즐비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창에는 잡아온 물고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지나는 개들도 생선을 물고 다녔을 만큼 그렇게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강경에 교량이 놓이기 이전에는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홍수와 눈이 쌓여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의 피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경사람 석설산과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과 스님인 경원, 설우, 청원, 그리고 여산의 강명달, 강지평이 다리를 놓기 시작해 1년 미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 한다.




미내다리는 세 개의 아치형 교량 중 가운데가 크고 남북 쪽이 약간 작다. 받침은 긴 장대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돌려 구름다리로 축조하였으며, 석재는 40㎝×50㎝×110㎝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홍예 사이의 간지에는 드러난 면이 35㎝×150㎝ 정도의 장대석을, 잘 치석하여 반월형의 둘레에 따라 돌을 사다리꼴로 쌓았다. 부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맞추어 아치를 형성케 한 축조방법은, 당시 선조들의 재주가 과학적으로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짐작케 한다.

염라대왕이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면 ‘강경 미내다리를 살아생전 보고 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 정도로 강경장은 포구를 끼고 발달한 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미내다리는 그 장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미내다리가 망가져 사람들이 통행을 뜸하게 할 때, 이 미내다리 돌을 가져다가 집에 쓰려고 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을 쳐 공포에 떨고는 했다는데, 거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다.



미내다리가 없어 늘 통행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두 청년을 시켜 다리를 놓게 하였다. 다리를 다 놓고 보니 경비로 걷어준 엽전이 남았는지라, 두 청년은 이를 나중에 다리를 보수할 때 쓰리라 생각하고 다리 밑에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 한 청년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때 같이 다리를 놓은 친구가 우선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묻어둔 곳으로 가, 다리 밑을 파보았으나 엽전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병석에 누운 청년은 더욱 병이 악화되다가 구렁이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미내다리 밑으로 들어가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폐교(廢橋)가 된 미내다리 돌을 갖다 쓰려고 하면 벼락이 치고 날이 어두워져, 놀라 다시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벼락이 그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미내다리의 돌은 ‘구렁이 돌’이라고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난 추석날 미내다리를 건넌다.


아마 이렇게 청년이 구렁이가 된 것은 미내다리 밑에 묻어두었던 엽전을, 몰래 꺼내서 약값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미내다리는 정월 보름날 다리를 자기 나이수대로 왕복을 하면, 그 해에는 액운이 소멸된다고 한다. 또한 추석 날 이 미내다리를 일곱 번을 왕래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다.

우리 풍습에는 정월에 ‘다리밟기’라는 놀이가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리를 밟으며 건강을 기원한다. 미내다리를 건너는 것도 그러한 놀이에서 연유가 된 속설로 보인다. 이번 추석에는 미내다리를 일곱 번 걸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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