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처음으로 집을 지은 해수로 따지면 226년이 되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에는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외측이라는 건물과, 담 밖으로 지은 초가인 노비들이 묵는 '호지 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고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축미를 보인다는 정읍 김동수 가옥 사랑채 

부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고택 답사를 하다가 만난 김동수 가옥.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고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곳곳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이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동수 가옥 담 밖에 여덟채가 담장을 둘러 있었다고 하는 호지집.

노비가 살던 집이라고, 글쎄 그럴까?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형태를 본다면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부족하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또한 이 집들의 자리 배치를 보아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하기에는 맞지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은 부농의 상징이다. 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보면 인근에 곡창지대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이 집 안에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볼 수가 있다. 그만큼 많은 재물들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집안에 대문채나 중문채에도 방들이 있어, 굳이 담 밖인 외부에 몇 채의 집을 지어, 노비들을 그곳에 살게 했다는 것도 설들력이 부족하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와, 대문채와 중문채 사이 한편에 자리한 외측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도적을 맞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사병들을 기거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하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던 사병들이 묵었다고 볼 수 있다. 사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금지가 되어있는 시대에, 대신 노비라고 신분을 숨겼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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