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의 행사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를 하는 대동의 놀이이다. 그 중에서 가장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놀이는 줄다리기이다. 줄다리기는 우리나라의 전역에서 고르게 나타나던 대보름의 세시민속놀이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줄을 당기고 난후 마을마다 줄을 이용하는 방법이 틀리다.

어느 곳에서는 줄을 당기고 난후 당산나무나 선돌 등에 감아두는가 하면, 어느 마을에서는 보를 막기도 한다. 또한 줄을 잘라 지붕 위에 던지면 액을 막는다고 하여, 줄을 잘라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한 줄은 마을마다 그 처리방법 등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내적인 면에 있어서는 풍농, 가내의 안과태평, 마을의 평안 등으로 귀착이 된다.


액송을 하는 여주 흔암리 마을

여주군 흔암리 마을에서는 예부터 정월 보름날 줄을 당기고 나서, 그 줄을 얼어붙은 청미천 위에 갖다 놓았다. 줄에는 작은 액송기를 꽂아, 날이 풀리면 액송기를 꽂은 줄이 남한강을 따라 떠내려간다. 그렇게 줄이 떠내려가면, 모든 액이 다 사라진다는 속설을 갖고 있다. 남한강 둔치에서 벌어지던 여주의 대보름 액송의식을 사진으로 들여다본다.

줄을 당기고 난 후 풍물패들이 인도를 해, 액송기를 꽂은 암줄과 숫줄을 강으로 들고 간다


줄을 당긴 후에 줄을 강가로 옮기고 있다(위) 줄에 꽂은 액송기. 자신의 서원을 적은 기를 줄에 꽂는다.


줄과 함께 떠내려 보낼 액송집 앞에 촛불을 켜고 있다(위) 액송기를 꽂은 줄(아래)


액송의식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풀이를 추고 있다. 살풀이는 남한강 물속에서도 이루어진다. 남한강에서 생명을 잃은 모든 것들의 원을 풀어버리는 의식이다.



액송집과 함께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액이 사라진다고 한다.


떠내려가는 액송기를 꽂은 줄과 액송집. 그리고 또 하나의 줄을 보내고 있다(아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쌍룡(암줄과 숫줄). 이렇게 아름다운 대보름의 액송의식이 4대강 개발로 인해 남한강 둔치가 사라지면서 함께 중단이 되어버렸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으로 4대강 개발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집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여주장날 만나뵌 어르신들은 예전에는 남한강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하신다. 당시에는 물장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30년 전에도 저 강물을 마시고 살았어"

 

여주군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남한강. 여주 사람들에게 그 강은 그냥 흐르는 강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고, 그곳을 통해 사람들은 삶을 영위해 왔다. 어려서부터 여주 사람들은 남한강 가에서 꿈을 키워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한강가의 은모래 금모래 백사장에는 여름철이 되면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고는 했다. 지금이야 수영이 중지되어 있어 물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여름철이 되면 모래밭 가에 있는 숲에서 더위를 피하고는 했던 곳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꿈이 영글어 있는 남한강이 송두리째 파헤쳐지고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피눈물 나는 호소를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여기저기 4대강 개발을 찬성한다는 현수막들이 군 전체 광고물 게시대에 자랑스럽게 붙어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떻게 자신들의 생명의 강을 이리 훼손이 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반대다운 반대를 하질 않고 있는 것인지.

 

장날이 되면 많은 어르신들이 장으로 모여든다. 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곳이다. 서로 정담을 나눌 수가 있고, 지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주장에 물장수들이 많았다는데요."

"그럼 많았지. 그 사람들 얼마를 받았는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저 국밥 한 그릇에도 물을 날라다 주었어."

"물은 어디서 구해오나요. 근처에 샘이라도 있었나요?"

"샘은 무슨 샘. 여주사람들은 30~40년 전만 해도 강물을 떠서 식수로 사용했을 정도야. 그 때는 참 물이 맑았거든. 지금도 아마 우리나라 강중에는 가장 깨끗할 거야."

장터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여주강이 이렇게 변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속 터져 죽을 것이라고 한다.

 

▲ 낚시 남한강에서 고기를 낚는 모습. 지난해만 해도 남한강에서는 이렇게 고기를 낚아 살아가는 분들이 있었다. 이제는 치어는 물론 알까지도 씨가 마르고 있다고.

 

"그 왜 이포인가 사는 김씨 어르신도 얼마 전까지도 이포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고는 했어. 지금은 속병이라도 나셨을 것이여. 고기들이 떼죽음을 했다고 하니"

 

누구나 다 그런 추억 하나쯤은 갖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남한강 가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송두리째 파헤쳐진 남한강의 모습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몇이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물 한 지게에 국밥 한 그릇

 

"당시 물장수하시든 분들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물장수를 하고는 했지. 꼭 그 사람들만 한 것은 아냐. 여기 사람들도 장사할 밑천도 없고, 생활이 어려우면 물장수를 했으니까."

"물장수로 밥을 먹을 수 있었나요?"

"그 당시는 인심이 후했으니까. 물 한 지게를 지고 오면 국밥 한 그릇을 가득 말아주었지. 인심이 지금과는 다르니까." 

"물장수는 언제 없어졌나요?"

"한 20년이나 되었을까? 읍내에 수도가 들어오고 나서 부터인가 그래."

 

그렇게 맑던 남한강물이다. 지금의 팔당댐이 막히기 전만해도 여주대교에서 신륵사로 들어가는 입구 식당에서는 장어구이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남한강에 장어들이 많았었잖아요?"

"많았지. 팔당댐을 막기 시작하면서 장어들이 점차 줄어들었어. 1973년도인가 팔당댐을 완성한 후로는 거의 장어를 볼 수 없었으니까."

"하긴 그래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한테 수돗물 공급한다며 만든 팔당댐인데, 이제는 오염이 심각하다는데. 듣기로는 취수원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도 하네. 하기야 물을 가두어 놓았으니 당연히 안 좋아지지."   

 

▲ 청정지역 물이 깨끗하고 생태계가 살아있는 남한강은 달리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칠 필요가 없는 강이다.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는 일이 없어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가보니 예전 일이 생각이 난다. 여주에 와서 몇 달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마 한 20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만해도 신륵사 앞 식당들은 장어를 요리하는 집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팔당댐을 막고 난 뒤에는 장어가 점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번에 4대강 개발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자취를 감출 것인지. 지금부터 수도 없이 생명들이 죽어 가는데, 거기다가 하천 바닥에 있는 모래를 채취하느라 바닥을 긁어내, 치어는 물론 민물고기의 알까지 송두리 채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같이 자연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야할 수많은 생명체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은모래금모래 개발이라는 허울을 쓰고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의 명소. 금모래은모래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바로 그러한 생명체에 대한 무분별한 살생을 중지하라는 메시지다. 식수원을 마련한다고 막은 콘크리트 잠언제인 팔당댐. 그도 이제는 심각한 오염이 되고 있지 않은가? 보를 막는다고 또다른 콘크리트 시설물을 여기저기 막아댄다면, 그 또한 맑은 물의 오염원일 수밖에 없다. 이제 지난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테니까(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6, 7)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줄다리기를 하고 난 뒤, 줄에 액송기를 꽂아 마을 뒤편에 흐르는 남한강에 갖다 놓는다. 정월 대보름 줄다리기를 할 때는 남한강이 꽁꽁 얼어 얼음 위에 줄을 올려놓게 되는데, 얼음이 녹으면 이 줄이 물에 가라앉아 수많은 물고기들의 산란처가 되기도 한다. 이 흔암리에는 선사주거지가 있다. 모두 16채의 집터가 발굴이 되었는데, 남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남한강가의 집단 선사주거지

 

흔암리 선사유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60년대에 김원룡에 의해서다. 그 후 서울대박물관 고고학조사단이 1972년도부터 매년 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20여기에 가까운 움집터를 확인하였고 다수의 유물과 탄화곡물을 발견하였다. 집 자리가 확인된 곳은 마을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300여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123m의 산정상부 지점으로 유적은 이 산 경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 선사유적지의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있다. 민무늬 토기에는 화분형, 사발, 단지, 짧은목 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빗살무늬토기와 붉은 간토기 등도 상당수 발굴되었다. 석기로는 돌칼, 반달돌칼, 바퀴날도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농경용 연모와 함께 땅을 파 만든 저장고에서 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식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탄화미는 늦은 연대라 하더라도 연대가 최소한 기원전 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들로 판명되었다.

 

▲ 재현된 움집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 움집 출입구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은,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흔암리 유적지의 집의 형태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집들은 남북장축으로 풍화된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며, 포탄형의 특징적인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에는 화덕자리, 간단한 저장구덩이, 기둥구멍 및 출입구 등이 있다. 움집의 구조는 평면은 긴 네모꼴이며 가장 큰 집터는 길이 10m, 너비 4.2m로 나타나 상당히 큰 편이다. 이렇게 큰 집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도 집단주거지의 주축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현재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움집들은 당시의 기둥구멍을 확인해 세운 것으로, 안에는 화덕자리 등을 꾸며놓았다. 발굴 당시 나타난 움집들은 움의 깊이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같은 집터에서도 4벽이 서로 다르고 기둥구멍의 벽체가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둥의 서까래가 땅에 땋지 않은 반 움집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연모 중에서 그물추가 있었다는 것은 흔암리 선사유적지의 생활에서 농경을 주로 했지만, 뒤편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화덕자리 움집 안에는 화덕자리를 재현해 놓았다. 발굴 당시에는 이 화덕자리에서 숯이 발견되기도 했다.

 
▲ 남한강 흔암리 선사유적지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강. 이곳에서 물고기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현된 선사유적지 아쉬움이 남아

 

흔암리 선사유적지는 마을회관을 기점으로 양편으로 오를 수가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좌측 길로 들어서면 전신주에 '흔암리 선사유적 150m'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런데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흔암리 선사유적 80m'라는 이정표를 걸어 놓았다.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이정표다. 이런 안내판이 보일 때마다 화가 치미는 것은, 우리 문화재에 대해 관계부서에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보이는 것이란 생각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정표 하나도 확인하지 않은 문화재보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안내판1 선사유적지가 150m 전방에 있음을 알려준다
ⓒ 하성

▲ 안내판2 불과 1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갔는데 80m 라는 이정표가 걸려있다. 사소한것 하나도 확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곳의 입구는 마을회관 우측 길로 남한강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석비가 서 있는 곳으로 오를 수가 있다. 얼핏 생각을 해보아도 두 개의 거리가 맞지 않는 이정표 중 하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 주거지 석비 선사주거지를 알리는 석비는 남한강 방향으로 나가는 곳에 있다.

 

펜스로 둘러놓은 선사유적지는 현재 5동정도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자리만 하나씩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나 연모 등을 모조품이라도 놓아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돌아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볼 것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한 움집에는 누군가가 술을 마시고 빈병과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 쓰레기 누군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쓰레기를 버려놓았다. 문화재의 관리소홀의 한 단면이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흔암리 선사유적지. 우리의 농경문화와 더불어 강가를 주거지를 삼은 취락구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치고는 너무나 볼품없이 재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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