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갤러리

 

남문 로데오 거리. 수원 화성 팔달문 옆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부터, 수원 향교를 지나 도청으로 올라가는 길까지를 말한다. 이곳이 한 때는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거리를 활보했던 곳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거리에서 자신의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거리를 젊게 만들었다. 그랬던 거리에 젊은이들이 떠나버렸다.

 

90년대 초만 해도 이 거리에는 극장이 6곳이나 있었다. 그 극장 앞에는 늘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사람들은 이곳을 로데오거리라고 불렀다. 그만큼 활발하던 거리였다. 31일 찾아간 수원시 팔달구 남문 로데오거리. 이 젊은이들이 떠났던 로데오거리에 젊은이들이 찾아들고 있다.

 

주차장 외벽에 갤러리를 조상공사를 하고 있다. 지역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할 곳이다

 

애경백화점, 롯데쇼핑몰 이겨낼 수 있어야

 

로데오거리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젊은이들로 하루 종일 북적였던 곳이다. 하지만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젊은이들이 수원역 앞으로 옮겨갔다. 6개의 극장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는 마치 커다한 동공이 뚫린 듯 허전하기만 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로데오거리에 또 하나의 악재가 겹쳤다. 바로 수원역사 뒤편에 대형매장인 롯데쇼핑몰이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롯데쇼핑몰이 들어오면 더 어려운 난관이 닥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상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것.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기 위한 자구책을 상인들과 지역예술가들이 마련하기 시작했다.

 

로데오거리에 있는 작가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2012년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아름다운 테마거리 가꾸기를 추진하고 있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폐업중인 상당수의 빈 가게를 활용하여 야간조명을 설치하고, 그곳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서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있는 거리를 아름다운 테마거리로 변화시키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로데오 갤러리 1관. 앞으로 이런 작은 전시 공간을 더 마련한단다 

 

거리자체가 갤러리로 변해

 

31일 오후에 돌아 본 로데오거리. 거리 곳곳에 젊은이들이 보인다. 그동안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눈에 띠게 많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가 젊게 변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커피숍들이 문을 열고, 나름대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지금이 오히려 우리 로데오거리가 살아날 수 있는 호기인 줄도 모르죠. 상인들이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단합이 잘 될 수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교동창작촌을 중심으로 화가들이 로데오거리를 거대한 갤러리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교동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는 한 주민은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이야기를 한다. 로데오거리 여기저기에는 많은 그림들이 걸려있다. 가로등에도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있어, 무심코 지나는 사람들도 위를 쳐다보고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남문 로데오상인회(회장 김한중)에서는 주차장 외벽에 야외 갤러리를 마련하느라 바쁘다.

 

그동안 문을 닫았단 영화 사영관들도 다시 시작한다 

 

이 갤러리에도 지역의 화가들이 작품을 그린다고 한다. 로데오거리 한편에는 로데오 갤러리 1이라는 작은 전시 공간이 생겼다. 지역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앞으로 자투리땅을 이용해 이런 갤러리를 더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과거의 젊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한 지역주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지금은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역주민들과 상가번영회, 지역의 작가들이 하나로 힘을 합칠 때, 곧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더구나 그동안 굳게 문을 걸었던 중앙극장이, 12월 초에 개관을 하려고 준비 중이기 때문에.

 

2013년 7월 2일에 입학식을 가진 남문 로데오시장 제1기 상인대학이 12일(목) 오후 2시 30분에 졸업식을 가졌다. 남문 로데오시장 상인회 사무실에서 가진 졸업식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대신해 한상담 수원시 경제정책국장과 수원시 의회 김명욱, 김상욱, 백정선 의원 등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이 날 졸업식에는 그동안 교육을 받은 41명이 졸업을 하였으며, 이들은 총 41시간을 수강했다. 교육은 기본과정 10회 20시간, 심화과정 10회 20시간과 견학 1회 등이 포함되었다. 처음에 신청한 이원은 50명이었으나, 41명이 졸업식을 가진 것.

 

 

앞으로 더 발전하는 상인회가 되길

 

이날 졸업식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을 대신해 축사를 한 한상담 수원시 경제정책국장은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염태영 수원시장님께서 생태교통으로 인해 바쁘신 일정 때문에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해달라고 당부의 말씀이 있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남문로데오 상가를 이끌어가는 주축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정석현 시장경영진흥원장을 대신해 참석을 한 이도열 교수는

“전국에 많은 시장들이 상인대학을 운영하고 있지만, 남문로데오 상인대학처럼 활발한 곳이 없었다. 1기 졸업생 여러분의 졸업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통계적으로 볼 때 상인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보다 졸업을 한 사람들은 13% 정도의 매출이 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김한중 상인회장을 주축으로 해, 지금보다 더욱 하나로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2달 반 동안 정말 고생들이 많았다.”고 축하를 해 주었다.

 

 

“여러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졸업생 대표로 소감문 발표를 한 진남순 동창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처음에는 어떻게 이 교육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생업을 위해 살아가는 상인들이 2달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다 함께 박수로 서로를 격려하자.”고 박수를 치기도.

 

졸업식을 마치고 난 뒤 기념촬영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상인대학 졸업생들. 기념촬영을 마치고 난 뒤 가족들과 사진을 찍던 한 졸업생은

“정말 꿈만 같다. 밤늦도록 장사를 하고 난 뒤 2개월 반 동안 40시간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대견하다. 앞으로 더 열심히 가족들과 상인회, 그리고 남문 로데오시장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또 한 졸업생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축하를 해주셔서 정말 고맙다. 상인대학을 짧은 시간에 교육을 마치기 위해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졸업을 했다는 것이 감개무량하다. 이런 정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아까 교수님께서 대학을 졸업한 상인들이 운영하는 업체가 13% 정도나 매출이 증가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더 많이 연구하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한다.

 

남문로데오시장은 수원시 팔달구 교동 3~11 일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김한중 상인회장을 비롯하여 250개의 점포의 업주들이 있다. 시장에는 음식점과 의류, 액세서리, 공산품 등의 상점들이 있으며, 2005년 7월 20일 전통시장으로 등록이 되었다.

 

남문 로데오 거리. 한 때는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거리에서 자신의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거리를 젊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거리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하다. 젊음을 발산하던 ‘끼’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느 시장통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한가한 모습만이 남아있다.

 

90년 초 이 거리에는 극장만 해도 6곳이나 있었다. 그 극장 앞에는 늘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사람들은 이곳을 ‘로데오거리’라고 불렀다. 그만큼 활발하던 거리였다. 8월 16일 찾아간 수원시 팔달구 남문 로데오거리.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점포를 열어놓고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지쳐 보인다.

 

“한 때는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거리였죠.”

 

남문 로데오거리는 한 때 젊은이들이 줄을 이던 곳이다. 그런 거리가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이 한산하다. 로데오거리 한편 4층에 있는 상인회 사무실을 찾아가 보았다. 무더운 날임에도 무엇인가 고민을 하고 있는 상이회 김한중 회장의 모습이다.

 

“저희 로데오거리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옮겨갔죠. 6개의 극장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는 마치 커다한 동공이 뚫린 듯합니다.”

 

김한중 회장은 그런 남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한다. 이제 상인회장을 맡은 지가 4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로데오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저런 많은 해결방안을 모색 중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은 상인대학을 운영 중입니다. 우선은 상인들이 어떻게 이런 난관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을 먼저 배울 필요가 있으니까요. 일주일에 화요맇솨 수요일 하루에 두 시간씩 20회, 총 40시간을 공부를 하게 됩니다.”

 

상인회 회장실 앞에는 책상위에 교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운동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상인들이 언제든지 이곳을 찾아와 체력단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식지도 만들어 새로 입점을 하는 상점들도 소개하고 있는 소식지로 인해,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구책 마련해 노력, 살아남기 위한 싸움

 

지금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로데오거리에 또 하나의 악재가 겹쳤다. 바로 수원역사 뒤편에 롯데쇼핑몰이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롯데쇼핑몰이 들어오면 더 어려운 난관이 다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상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것.

 

 

“저희들은 이래저래 많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어려운데 더 어려워질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럴 때가 호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 무엇인가 노력을 해보아야죠. 그래서 빈 건물을 수원시와 협의하여 창업지원센터를 개설학도 200여명의 인원이 입주했습니다. 올해는 성장지원센터도 문을 열었고요.”

 

그것만이 아니다. 로데오거리에 있는 작가들과 지역 예술가와 함께 2012년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아름다운 테마거리 가꾸기를 추진하고 있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폐업중인 상당수의 빈 가게를 활용하여 야간조명을 설치하고, 그곳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서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있는 거리를 아름다운 테마거리로 변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빈 건물의 공실벽면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것만이 아니라 작품을 제출한 학생들에게는 자기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김한중 상인회장은 사업 추진을 위해 미술연합회와 협약식을 체결하였으며, 이로서 지속적인 미술작품을 제공받아 가로등에도 액자형 배너를 이용한 작품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통해, 남문로데오 거리가 아름다운 테마거리로 바뀌어 보다 많은 시민이 찾게 되고 상권도 더욱 활성화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로데오거리 옛 명성 찾도록 노력할 터

 

“올해는 팔달산을 오르는 입구에 청소년문화공연장이 개설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청소년밴드가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극장도 한 곳이라도 다시 유치하려고 의논 중에 있습니다. 벽면갤러리도 구상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옛 젊은이들이 넘쳐나던 로데로 거리의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만들어야죠.”

 

한 때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누비던 남문 로데오거리. 팔달문 앞에 형성된 상가 중에서도 가장 번화했던 곳이다. 그간 김한중 회장의 많은 노력으로 조금씩이나마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공실을 건물 주인들과 의논을 해 작가들의 공방촌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이미 건물주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요. 어차피 비워둔 공실을 저렴하게 작가들에게 입주를 허락해 조금이나마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죠. 저희들이 노력을 한만큼 이곳을 떠났던 젊은이들도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노력을 해보아야죠. 이런 저희 상인들의 노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도움을 바랍니다.”

 

올 9월 인접한 행궁동에서 열리게 되는 ‘생태교통 수원2013’에 몰려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로데오거리로 끌어 들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 김한중 회장. 앞으로 달라질 로데오 거리를 기대하고 싶은 것은, 그런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다.

2년 여 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친 팔달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꾸민 팔달문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414일 오후에 팔달문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그 바람으로 인해 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촬영을 하느라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팔달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사 실명제 석판이 가장 뚜렷해

 

196493일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그동안 갑갑하게 공사 때문에 가려져 있던 팔달문이, 모든 공사를 다 마치고 말끔하게 새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 옹성 쪽으로 나가다가 문의 겉 벽면에 있을 공사실명제 판을 찾아보았다. 이 실명제 판은 4개문에 다 있지만, 장안문은 6.25 때 폭격을 맞는 바람에 깨어졌다고 한다. 대신 그 내용을 적어 옹성 안에 비로 제작을 해두었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문 벽에 있는 실명제 판에는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등 85의 기술자가 팔달문의 조성에 참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꿀이 흘렀다는 팔달문

 

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때 사용하는 비녀이다. 그 크기만 해도 팔달문의 장엄함을 알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옹성의 벽을 바라다본다. 참 단단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양편의 성곽이 끊어져 아픔을 더하고 있지만, 그 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옹성의 문이 삐그닥거린다. 만일 그 소리를 과거에 적들이 들었다고 하면, 그 소리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만 같다. 함께 팔달문의 구경에 나섰던 김우영 e수원뉴스 주간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어디쯤인가 성문 벽에서 무엇이 흘러 내렸데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달았다는 거예요. 성돌을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해요

 

팔달문은 생명을 살리는 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던 곳. 팔달문 앞의 장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장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 있어, 꿀벌조차도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공사를 마치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팔달문. 주변을 돌아보다가 보니, 성문 벽 밑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도 생명이 그것에서 움튼 것이다. 비록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온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달문, 팔달문을 자랑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은, 새롭게 치장을 한 팔달문을 만났다는 감흥 때문이다.

수원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은 ‘팔달문’이요, 북문은 ‘장안문’이다. ‘팔달(八達)’이란 그야말로 팔방 어느 곳이나 다 통한다는 뜻이요,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 앞은 ‘성시(成市)’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곳의 지형을 살핀 것으로 보인다. 이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정하기 위해, 전국의 명당이라는 곳을 직접 다니면서 조사를 하기도 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달마동, 용인 등, 능터로 좋다는 곳을 직접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정조가 직접 거론한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리고 이곳에 화성을 축조한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기 전에 미리 한 일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들어설 자리에 많은 사람들을 옮겨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거북산당’이라는 당집이 있다. 이 당집은 화성을 축조할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전한다. 아마도 남문 밖에 성시(시장)을 개설하고, 그곳에서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노역자들이 장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지금도 팔달문 인근에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원 상권의 중심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들어갈 곳이 없는 성문, 아름다운 옹성

팔달문의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는 다포계 양식이며,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헌데 남문과 북문의 옹성을 보면 동문인 창룡문이나, 서문인 화서문과는 또 다른 형태이다.


 

2011년 8월 28일 현재,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보수 공사중이다. 팔달문의 자료는 2004년 8월 24일에 답사한 자료이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를 할 때 고증하여, 화성성역의궤의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크다. 현재 보수 공사 중인 팔달문의 옛 모습을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으려는지, 하루 빨리 성벽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옹성에 홍예문을 낸 팔달문과 장안문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양 대문의 형태는 같으며, 규모와 건축수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비슷하다.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손꼽힌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 가는 길목인 장안문, 남으로 가는 길목인 팔달문. 그 두 문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장안문인 북문은 이곳을 기반으로 북으로 한 없이 뻗어나가는, 문물의 중심이 되고 싶은 뜻이 숨어있다는 생각이다. 팔달문 또한 이 땅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가겠다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아마도 대로인 이 두 곳의 문에서 이산 정조는 적을 섬멸하고, 더 큰 조선을 건설한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장안문의 용도에 서서 장안문의 현판을 바라다보며,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참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산 정조를 왜 우리가 ‘정조대왕’이라고 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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