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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