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중심에 위치한 석성산(471.5m)은 기암괴석이 빚어낸 아름다운 산세와 고즈넉한 사찰이 어우러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산이다 석성(石城)’산은 한문 그대로 돌로 쌓은 산성이란 뜻이다 원래 보개산으로 불렸으나 1910년 이후 부터는 석성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석성산의 동쪽에 통화사가 있고 북동쪽에 용인시 처인구 포곡면 마성리 77-23에 소재한 백령사가 있다. 7일 오후 큰 길에서 소로로 접어들어 고불고불한 길을 1.9km를 들어가 백령사를 찾았다. 오르는 길도 차가 마주치면 한 대가 비켜주어야 한다. 우거진 숲과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백령사.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염불소리가 마음을 정결하게 해준다,

 

 

주변이 모두 바위덩어리

 

 

주차장에 차를 대로 내리니 종무실에 계신 분이 묻는다.


등산 오셨어요?”

아닙니다. 절에 왔습니다.”

아마도 좁은 주차장에 등산객들이 차를 대고 산행을 하면 장소가 좁아 애를 먹는 모양이다. 주차장 한 편 텃밭에는 보살님 한 분이 상추를 솎아내고 있다. 저녁 찬거리라도 장만하는 모양이다.

 

경내로 들어서니 주변이 모두 바위덩어리들이다. 그 틈새에도 화단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다. 마침 갈증이 나는 목을 물 한잔으로 가시고, 적멸보궁을 향한다. 백령사는 적멸보궁 안에 목탑을 모시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그 곳에 모신 것일까? 오전에 산행을 한 관계로 땀을 흘려 몰골은 초라하지만 삼배를 한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백령사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본다.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석탑이 서 있다.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곁을 보니 커다란 바위에 새긴 부조가 보인다. 받침을 거북이로 하고 위에는 네모란 돌에 조각을 했다. 주변은 온통 용이 둘러있는데 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다. 산신을 조각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산신각이 보이지 않는다.

 

 

경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밖으로 나오다가 보니 동기와가 보인다. 자신의 소원을 적어놓으면 불사를 할 때 지붕에 올라가는 기와다 보인다. 한 장을 적는데 만원이란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극락왕생 발원이라고 적은 후 불전함에 만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옛 백령사의 흔적에서 깨딜음을 얻다.

 

백령사는 오래 전에 들린 적이 있다. 그때는 바위 위에 작은 전각이 하나 서 있고, 주변의 바위에 온통 동전을 붙여놓아 한 참을 웃은 적이 있다. 오늘의 백령사는 그 곳에서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한다. 내려오는 길에 옛 백령사를 찾아보았다. 계단을 올라 작은 계곡에 걸린 다리를 건넌다.

 

 

기와로 쌓은 낮은 담장 안에 전각이 보인다. 예전에 찾아보았던 백령사다. 전각 앞에는 현판도 걸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에 걸린 탱화를 보니 삼성각으로 이용을 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 바위에는 예전에 동전을 붙였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마도 바위에 붙였던 동전들을 다 떼어낸 것일까?

 

그런 자리들을 보면서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겨 놓은 자리도 이렇게 흔적이 오래 남아있겠거니 생각을 한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세상을 바로 살라고 한 것일까? 새삼 세월호의 아픔이 얼마나 오래 남아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붙였다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간월암이 처음부터 간월도나 간월암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 조선이 개국할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끔을 해몽하면서 이미 이성계가 태조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조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터를 바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조 때 배불정책을 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가는 알고 있는 바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그리고 이성계에게서 두 곳의 섬을 사폐지로 받은 무학대사. 하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배불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무학대사가 토글을 짓고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개국이 되는 것을 도왔지만, 그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이 폐사가 되었다. 아마 조선의 왕이 28대를 전해 질 것을 알았다는 무학대사인데, 간월암이 훗날 당한 고초를 알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광복을 의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 절에 기운이 남다른 모양이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간월암

 

삼사순례,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불교의식이다. 7월 28일(일)아침 일찍 버스로 수원을 출발했다. 수원시 지동에 소재한 고려암의 신도들이 삼사순례를 떠난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막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오늘 들릴 세 곳의 절에 나름 문화재가 많이 있어 기대를 하고 떠난 길이다. 홍성 나들목으로 나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간월암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데도 바닷바람이 조금은 세찬 듯하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몇 번이고 날아간다. 그래도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간월암은 조수의 차에 의해 섬도 되었다가, 육지와 연결이 되기도 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물을 빠진 길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바위에 붙은 것들을 열심히 줍고 있다.

 

간월암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시예불 중이다. 작은 섬 위에 옹기종기 앉은 전각들이 정겨운 곳. 벌써 몇 번째 이곳을 찾았지만, 올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주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살 때문인 듯하다. 잠시 예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쪽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 앞에서 열심히 잘을 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신통력이 절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은 전각이 바다 쪽으로 조성을 한 것을 보니, 용왕각인 모양이다. 열심히 절을 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썰물처럼 간월암을 빠져나간다. 나오는 길에 절 입구에 사람들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돌탑을 정성으로 쌓은 사람들도 마음에 다 서원이 있었을 것. 나도 잠시 고개를 숙여 행로의 무사함을 빌어본다.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들음 을 얻었고, 그 이전에도 이미 피안사라는 절이 잇었다고 하면, 간월암의 역사는 500년이 훌쩍 지난 고찰이다. 하지만 옛 흔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월암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절집이 있으니,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남원시 산동면 식련리 221번지에 있는 승련사는 원래 ‘금강사지’라는 폐사지였다. 이 금강사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로 전해진다. 이곳의 삼성각 뒤편에는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10m 정도 되는 바위들이 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이 바위에 희한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길게 늘어선 것이 기차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 바위의 넓적한 면에는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 2점과, 그 옆에 내려 쓴 ‘옴마니반메훔’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런 밀교의 문양이 왜 이곳 옛 사지 인근 바위에 새겨진 것일까?


우주의 이치를 상징한 유가심인도

유가심인도는 우주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높이가 70cm 정도로 음각한 유기심인은,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공으로 표시를 했으며, 그 위쪽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는 것이다.

승련사 주지인 경헌스님은 이곳 폐사지에 들어와 처음으로 절을 중창하고, 이 유가심인도를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와서 부적을 파 놓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저 바위에 있는 그림을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부적을 파 놓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대산 적멸보궁 뒤에도 같은 그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 밀교의 문양이라는 것이죠. 고려시대에 이곳이 밀교의 수행도량으로 유명했나 봅니다.”



그러면서 이 유가심인도를 찾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유가심인도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옛 스님들이 이곳 폐사가 된 금강사에 거처를 정하시고, 저 그림을 부처님의 고행상으로 알고 정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심인은 얼핏 보면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팔과 몸 다리를 어느 지방의 장인이 조각을 하다가 완성을 하지 못한 듯하다.

“저 유가심인은 머리가 없어요. 아마도 부처님을 상징할 때 저기까지만 조각을 하고, 그 위는 우주를 머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죠”

마치 머리가 없는 마애불을 조성한 듯한 유가심인도. 그 위에 머리는 우주가 된다고 하니, 그 깊은 깨달음을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가심인

삼성각 뒤편으로 돌아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은 고려 때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금강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무슨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의 절이라고만 전해질 뿐이다. 남원지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절들이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혹 금강사도 그 당시에 소실이 된 것이나 아닌지.

바위에는 유가심인도 2점과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 말고도,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조성한 흔적들이 보인다.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안상과 같은 형태로 파 들어간 듯도 하다. 아마도 이 절이 고려시대의 절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밀교의 상징인 유가심인. ‘비밀불교’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밀교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 들어와 수행을 한 흔적이다.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의 세계를 말한다. 아마도 승련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 그러한 깨달음의 성취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유가심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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