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이야 고령사회가 되었으니, 60년이란 세월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분야에서 60년을 외길로 걸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손은 그렇게 곧추세우지 말고 비스듬히 해서 아름답게 끌어 올려”

 

음악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김진옥 선생은 벌써 춤을 시작한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께 이끌려 처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강산이 5번이나 뒤바뀐 세월이 되었다.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흥건히 흐르고 있는 날이지만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제자도 모두 열심이다.

 

“교방춤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흥과 한을 동시에 갖고 있는 춤이다. 먼저 마음으로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교방춤을 출 수가 있어”

 

 

부채를 쥔 손 하나하나를 지적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타이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열심을 하는 길만이 제대로 된 춤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진 교방춤

 

교방무는 고려 문종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관기제도에 따라 교방청에서 전해진 춤을 말한다. 교방청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절을 맞이할 때, 관에서 특별히 기예를 익힌 ‘예기(藝妓)’들로 하여금 연희에 참석을 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관의 한 기구였다.

 

교방은 고려 때부터 제도적으로 곤에 속해 예기들을 가르쳐 왔으며, 조선조 광무 4년인 1900년에 궁내부에 교방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산왕조의 몰락과 함께 관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1905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교방에 속해있던 예기들은 ‘기녀조합’을 결성하게 되었고, 악가무(樂歌舞)로 생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단단한 기본으로 다져진 춤꾼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진옥 선생(여, 65세)은 남다른 열정을 갖고 춤을 추는 춤꾼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춤은 이제는 선생에게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다. 하루에도 몇 곳을 돌며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쳐야 한다며 늘 바쁜 걸음을 걷는다.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춤을 춘 세월도 오래지만, 그만큼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제자를 키워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국내외를 돌면서 한 공연 횟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동안 참 숨 가쁘게 달려왔네요. 지금은 저희 교방춤 보존회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에 까지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외국 공연도 활발하게 하였죠. 이제는 한 숨 돌리고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요.”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릴 것

 

경기도와는 이미 1990년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990년에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경기도지회에 무용부가 발족이 되면서 지회장인 김동숙으로 부터의 부탁을 받아 회원들을 가르친 것이 경기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써 경기도에서의 2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1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무용부는 1994년 문화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을 가질 만큼 열심들을 냈다.

 

2001년에는 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를 맡기 시작하면서, 경기도의 춤꾼들에게 본격적으로 교방춤을 가르쳤다. 무용을 전공한 제자들만 하여도 수십 명에 이르고 일반인들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수백 명이 넘는다고 한다.

 

“경기도는 화성재인청(수원)이 있던 곳으로 제인청의 춤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선생님들 말씀을 들으면 교방 또한 경기도의 여러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화성행차시나 혜경궁 홀씨의 연례에도 교방에 속한 예기들이 연희를 한 것을 알 수가 있죠. 하기에 경기도는 교방춤에 대한 재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기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안성 국립한경대학을 비롯하여 명지대학교 예술종합원, 경기국악당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기도에도 교방춤보존회 경기지회(지회장 심규순)을 비롯해 화성, 수원, 용인, 안성, 평택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그동안 춤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교방춤을 가르친 고 정민선생을 비롯하여 전 진도씻김굿의 보유자인 고 박병천 선생, 그리고 벽사 한영숙 선생의 전통춤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늘 마음이 바빠진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있으니 제자들과 함께 무엇인가 경기도를 위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명인명무전 등에 초청이 되어 춤을 추면서도 늘 경기도에서 큰 무대를 한 번 만들고 싶었거든요. 내년쯤에는 경기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20년을 넘긴 기념으로 교방춤의 제전을 한 번 열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선생님들께 그동안 배워 온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선생은 몇 년 전에 mbc TV 일일연속극 ‘왕꽃선녀님’에서 탤런트 사미자와 이다해에게 한국무용을 지도하여, 극중 문화센터 한국무용강사로 직접 출연하여 한국무용을 지도하는 장면이 여러 회 방영 된 바도 있다. 대담을 하면서도 연신 제자들의 연습을 하는 곳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김진옥 선생. 아마도 그런 열정이 있는 한 경기도에 멀지 않아 교방춤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참 오랫동안 춤을 추어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춤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세상살이를 하는데도 기본이 되었다. 항상 춤 속에서 생활을 하다가보면, 세상 모든 것이 춤과 연결이 되어 진단다. 춤꾼 김진옥은 그렇게 50년 이상을 춤 속에서 살아왔다.

 

4월 2일 용인시 기흥 민속촌 인근에 있는 경기도 국악당의 제1강습실. 장구를 둘러멘 사람들이 열심히 장단을 치면서 춤을 배우고 있다.

 

“손을 이렇게 끌고 오다가 아름답게 넘겨야지. 그래야 태가 아름답게 되지. 그냥 위로 올리면 그건 춤이 아냐”

 

 

어린 나이부터 춤을 시작해

 

춤을 추는 춤꾼들은 거의가 어릴 적부터 춤에 입문을 한다. 춤을 배우게 되는 계기 역시 흡사하다. 어머니들이 춤을 좋아해, 어머니들의 손에 이끌려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12명의 강습생들에게 ‘정민류 교방장고촘’을 가르치고 있는 김진옥(여, 64세) 역시 어린 나이에 종로 5가에 있는 정민무용학원을 찾아간 것이,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을 춤과 함께 살아오게 된 계기이다.

 

“참 그동안 정말 열심히 춤을 추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저는 제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를 해요. 앞으로도 저는 제 춤 길을 갈 것이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제자들을 가르쳐야죠.”

 

 

 

그래서인가 강습생들에게도 길을 유난히 강조를 한다. 아마도 그런 자신이 평생을 쌓아올린 춤에 대한 열정이 그 말 한 마디로 함축되는 듯하다.

 

“아무리 바빠도 춤은 춤길이 있다. 그 춤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

 

춤이 곧 인생일 수밖에 없어

 

다음 카페 ‘정민류교방춤보존회’에 소개된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끝이 없다. 그만큼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경기도 국악당에서 강습생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대학 강의 등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일정을 소화를 해내는 것을 보면, 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무용과 객원교수, 국립한경대학교 사회교육원 전임강사, 정민류 교방춤 보존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용인시지부 고문,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서울시연합회 안무장, 경기 토속민요 연구회 이사, 한.얼무용단 수원지부, 용인지부, 과천지부 예술총감독, 한맥예술단 예술감독, 서초 체육쎈타(YMCA) 한국무용 강사, 창무회 화랑 회원

 

카페에 소개된 이력의 앞부분이다. 그 밑으로는 한참을 내려가야 할 만큼 일 년에도 많은 공연무대에 섰다. 많게는 일 년에 10여 차례의 공연을 가질 만큼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대 위에 올랐다.

 

“원래 정민선생님은 김해랑 선생님의 제자예요. 김해랑 선생님은 1953년도에 서울에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를 설립하시어 초대 이사장직과 마산 경남무용협회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셨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을 신무용으로 발전시키신 분입니다. 정민 선생님과 최현 선생님의 최초의 스승이기도 하시고요. 안타깝게 55세의 나이로 타계를 하셨죠.”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

 

그런 김해랑 선생에게 사사를 한 고 정민 선생은 대구에 머물 때 밤마다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을 배웠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이 폐청되고 난 후,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대구에서 교방춤을 배운 정민선생은, 북가락과 장고춤 등 나름 교방춤으로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정민 선생님은 1928년 11월 4일 일본에서 태어나 2006년 1월 5일 79세 일기로 타계하셨어요.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선생은 광복이전부터 연극과 노래를 하면서 예능계에 데뷔하며 일본예술단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 승무로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1955년부터 각 대학과 고등학교의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 우리 춤의 보급에 앞장을 섰던 분이시죠“

 

 

그런 정민 선생에게 교방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춤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고 한다. 이미 한영숙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임인 벽사춤 아카데미의 이사이기도 했던 김진옥 선생은, 벽사춤과 함께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민선생님의 교방춤은 정말 우리 민속춤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생님은 대구에서부터 나중에 일본에 가신 후에도, 교방의 기생들에게 춤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수십 가지가 넘는 교방춤을 그렇게 전수를 해주셨죠.”

 

정민류교방춤의 제1호 이수자이기도 한 김진옥 선생은 교방춤을 보급하고 알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는 서울본부를 비롯해, 부산광역시지부, 경기도지부, 인천남동지부, 경남지부, 전북지부, 김해지부 등이 있다.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보존회 회원들은 일본 오사카본부를 비롯해 동경지부와 교토지부가 있으며, 미국 LA에도 본부가 있다.

 

“지난 해 추석 때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가졌었습니다. LA에서 공연은 정말 감명 깊었죠. 1,300석을 꽉 메운 관중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보존회의 이름으로 정민선생님을 기리는 공연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그대로 춤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그래서 춤꾼들은 사는 일상이 춤이라고 하는가보다. 평생을 춤으로 살아온 김진옥 선생. 교방춤의 멋을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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