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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