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를 참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요즈음 전국적으로 유명한 벽화가 어디 한 두 곳이던가? 수 없이 많은 벽화가 전국적으로 조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벽화를 많은 블로거 등 SNS를 하는 사람들이 찾아다니면서 소개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벽화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그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마을이 있다. 아마 이곳보다 더 좋은 마을은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1. ‘대추동이마을이라고 한다, 조원동은 과거와 현대가 함께하는 곳이다. 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면 참 알지 못할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저 언젠가 몇 생애 전에 어디서 본 듯한 생각이 든다.

 

 

그 많던 대추나무는 다 어디로 갔소?

 

광교산은 수원의 진산이다. 조원동은 이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옛 명칭이 조원말이나 대추원혹은 주안말이라고 했다. 조원말은 조선조에 이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벼슬이 이조참의에 올랐는데 그 사람의 호가 <조포>였단다. 호를 조포라고 쓰던 분의 함자는 이동일이다.

 

조원동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하여 대추원, 조원말, 또는 조원, 주원말, 주안골, 주원, 주안말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한편 조원동은 백제 때 <우성위>라는 인색한 부자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 우성위라는 백제시대의 인물을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지금의 조원동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조원공원의 땅 부자들 때문은 아닐까?

 

 

백제 때 임금의 부마인 우성위라는 사람이 조원동 갓모봉 아래 살았다. 현재 조원동이 모두 우성위의 땅이었단다. 하지만 그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우성위의 집을 찾았다. 시주를 부탁했으나 거절을 당하고 물이라도 한 모금 달라고 했으니 그도 거절당했다

 

전설은 늘 재미있다.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들었다. 논밭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던 터에 스님은 우성위에게 쫓겨나면서 마장산 너머 광교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끌어오면 가뭄이 해결될 텐데...”라고 했다. 우성위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 스님을 잡고 물었다. 스님은 마장산 중간을 파면 절로 광교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이곳으로 모일 것이라고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우성위는 당장 물을 끌어올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원동은 광교산에서 흐르는 수원천보다 지대가 높았다. 그리고 조원동의 마장산 일대는 거문고 혈이라고 하는 명당 중의 한 곳인 탄금혈(歎琴穴)이었다. 스님이 복수를 하고 떠난 것이다. 우성위는 명당의 혈을 끊어 가산이 탕진되고 망하고 말았다. 우성위가 팠다는 수로의 흔적이 30여 년 전만 해도 영화동에서 조원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길가에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기와와 벽돌로 이렇게 벽화를 그리다니

 

조원시장에서 장안구청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좌측에 숲이 우거진 곳이 있다. 바로 맹꽁이 서식지라는 조원공원이다. 그 공원 산자락 밑에 도로를 따라 축대가 있다. 높이는 1m 안팎이다. 그런데 그 축대가 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벽화길이다. 2014 마을르네상스 사업으로 완성한 대추동이 문화마을의 사업으로 완성을 했단다.

 

3월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벽화길. 그저 바라다보면 그 멋을 느끼기에 조금은 부족하다. 천천히 벽화를 둘러본다. 세상에, 붉은 적벽돌과 기와조각을 갖고 이런 벽화를 조성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 안에는 별별 것이 다 있다. 화성도 있고 수원도 있다. 당연히 조원동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마돈나도 있다.

 

이 벽화조성은 조원초등학교, 영화초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체험학습으로 참여를 했다고 한다. 이런 벽화를 조성하다가 보면 지역이나 세대 간의 갈등은 소통과 나눔으로 해소하고 지역 공동체를 창출하게 된다.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정서가 깊이 뿌리내린 이름다운 벽화길이 조성된 것이다.

 

한참이나 벽화길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지나던 한 분이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어머니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그 기와와 벽돌을 깨고 붙이면서 정말 재미있어 했어요. 우리 조원동 좋은 마을예요. 많이 자랑 좀 해주세요.”

 

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예전에, 아마 10여년은 되었을 것이다. 현재 수원 행궁 앞에서 매교동으로 내려가는 현재의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날만 저물면 술이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저 몸을 흔들면서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이 영 가시지를 않았다.

12월 첫 날, 오후에 들려본 행궁 길. 예전에 모습은 단 한 곳도 찾을 수가 없다. 깨끗한 거리에는 커다란 화분위에 사철나무가 심겨져, 날이 추워졌는데도 불구하고 푸른색을 자랑하고 있다. 몇몇 집은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행궁 길, 이름에 걸맞아

행궁 길이라는 어둡고 우중충한 뒷골목이 변화를 한 것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였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몇 사람 지나다니지 않는 뒷골목으로 들어 온 예술가들에 의해, 어둡고 침침하던 행궁 길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20여명의 예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이 거리를 살리기 위해 자비를 들여, 거리축제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아는 예인들을 끌어들여 함께 축제에 동참을 했고, 서서히 그 축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와를 이용해 담장을 아름답게 꾸몄다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사람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술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고요.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리축제를 시작하게 되었죠. 이 거리가 이렇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서부터 였나 봐요. 2~3년 전부터 도로를 파헤치는데 하나가 끝나면 또 파기 시작하고, 참 대책이 없었죠.”




그렇게 아름답게 변한 도로에 걸 맞는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행궁 길에 입점한 예술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고 본격적인 거리축제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입점을 하기도 힘들어

“현재 이곳에는 공방이 15군데 정도 들어와 있어요. 이곳에 입점을 하려고 도자, 공예작가 등 5~6명이 대기를 하고 계신데 점포가 비질 않아요. 이렇게 길이 아름답게 변했으니 누가 이곳을 떠나려고 하겠어요?”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김난영 사무국장은, 이제는 들어오려는 예술인들이 있어도 자리가 없다고 귀띔을 한다.




행궁 길을 걷다보면 재미가 있다. 옛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집들이 있고, 가끔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도 보인다. 걷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한 행궁 길에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행궁 길에서 ‘소담 국시방’이라는 잔치국수전문점이 보인다. 겉모양으로만 보아도 예사 국수집이 아니다. 알고 보니 주인 김영수씨는 칠보공예작가라고 한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예술인들이 모여 자비를 들여 축제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거리를 조성하는데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로 간판과 기와로 만든 외벽의 장식, 그리고 집 앞에 놓인 커다란 화분입니다. 이 화분에는 각자 이름이 적혀 있어요. 관리를 맡은 점주들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바로 딴 것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그래서 각자 명패를 달고 있는 것이죠.”

행궁 길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우)과 사무국장 김난영

염태영 수원시장의 그린정책에 동반하여, 수원을 더 알릴 수 있는 공예품을 생산하겠다는 아름다운 행궁 길 예술가들. 2011년 3월부터 시작한 거리축제는 이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들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팔달구청과 행궁동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어 더 좋은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수원의 아름다운 행궁 길. 앞으로 이런 아름다운 길이 수원의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는 사지가 전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사지를 ‘한계사지’라고 한다. 11월 14일 오후에 찾아간 한계사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미리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사지를 둘러보았다.

한계사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이 절은, 조선시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계사가 있던 자리라고 본다. 1984년의 발굴 결과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금당터와 부속 건물터 등을 확인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을 오르는 고갯길에서 만나는 한계사지. 그러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계사

이 사지의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석탑과 석등, 석불 등의 재료와, 고려와 조선시대의 명문기와가 많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한계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계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는지, 정확히 언제 적에 사찰이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간다. 좌측 길 아래 장수대라는 정자가 보이는 도로 우측에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자리한다.



한계사가 서 있던 곳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들이 서 있어, 한계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었는지 가늠이 간다.(위)  한계사에서 발굴된 각종 석조물들과(가운데) 전각터(아래)  


어렵게 허락을 얻어 들어간 한계사지, 놀라워

관리사무소에서 한계사지 뒤편을 보면 기암괴석이 솟아있다. 앞으로도 마치 뾰족한 원뿔모양의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놓여있다. 한계사지로 오르는 길에는 굳게 철문이 막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덜려있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은지라, 철문을 열고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걸어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밑에서 보이던 기암괴석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인다. 오악(五嶽) 중 한 곳인 설악이 아니던가. 바라다만 보아도 그 장엄함에 눈을 땔 수가 없다. 폐가가 서 있는 뒤로 한계사지가 펼쳐진다. 한계사지 안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두 기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석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눈앞에는 많은 석물들이 철책 안에 자리한다. 각종 주추들이며 문 자귀틀, 그리고 석조로 조형한 짐승(사자인 듯하다)과 여러 조각으로 난 석물들이 즐비하다. 그 한편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옛 전각 터들이 보인다.

석물로만 보아도 옛 한계사를 그려볼 수 있어

석물 중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도 이 석조물들로만 보아도 한계사라는 옛 절이 그리 조그마한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에는 안상을 새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아마도 배례석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금당터 등은 석축이 남아있어 알 수 있지만, 여기저기 돌 축대 흔적으로 보아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좌나 다양한 문양으로 새겨진 주춧돌만 보아도, 이 한계사가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사가 언제 적에 누가 창건을 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석조물과 기와 등 명문으로 살펴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조에 와서 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도 멈춘 인제 한계령 고갯길 한편에 남아있는 한계사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더욱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나 말없는 석조물들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암괴석 위에 걸린 늦가을의 푸른 하늘과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 찾는 것이 있다. 같은 곳에 같이 가서 사진을 찍어도, 저마다 나름대로의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좋은 것을 찍으려는 마음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유별난 것인지도 모른다. 난 어디를 가나 꼭 열심히 찍는 것이 있다. 바로 담벼락이다. 그리고 집안을 기웃거리며 장독대를 찍다가 가끔 경을 치기도 한다.

날이 아침부터 꾸무럭하다. 바람도 선선한 것이 엉덩이가 들썩거려 못 견디겠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한 사흘 가만히 있었더니, 병이 도졌는가보다. 얼른 카메라를 둘러메고 한옥마을로 향했다, 초입서부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2010, 9, 9) 전주 한옥마을에서 내가 만난 담벼락들이다. 담벼락을 만나는 전주 한옥마을의 길, 가을철에 어슬렁거리며 걷기 딱 좋은 길이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다.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노라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다. 주욱~ 늘어선 담벼락이 마치 시간을 초월해버린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변하는 담벼락을 만나면서 이것은 누구네 집, 저것은 누구네 집을 꼽아본다. 손가락이 열개인데 그 손가락을 몇번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도, 담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길이 좋다.



  
난 늘 이 담장을 좋아하면서 살았다. 그것은 이 담장 하나가 그리도 포근하게 어린 나를 감싸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어릴 적 말썽을 피우다가 정말 눈물이 날만큼 혼이나고, 방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속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왔으니 얼마나 추울 것인가? 아마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람들로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그런 경험이 다 있을 테니까. 그때 담벼락 위에 삐죽 얼굴을 내민 기왓장이 눈을 막아주고, 담장은 한 겨울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 담장 밑이 왜 그리도 포근하든지.

황토와 기와의 만남, 그 자체가 예술이네




황토와 기와, 그리고 돌이 만나면 찰떡궁합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것이 담장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궁합이 들어맞았을까? 천천히 걷는 한옥마을 길에는 이런 찰떡궁합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연인들이 전주 한옥마을 길을 걸으면, 잘 헤어지지 않는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헛소문이라도 좋고, 지금 내가 지어낸 소문이라도 좋다. 그저 좋다면 좋은 것이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돌담 또한 운치가 있다. 돌을 그대로 척척 쌓아올리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놓았다. 참 담벼락이란 것이 묘하기는 하다. 어떻게 만들어 놓던지, 그 모습이 그곳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담벼락이 거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듯 말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격이 있다고도 한다. 누구는 부자고, 누구는 가난하다.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다. 누구는 똑똑하고, 누구는 멍청하다.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나쁘다. 이렇게 누구는 타령을 하다가 보면 석 삼일을 밤낮으로 해보아도 다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담벼락은 그런 것이 없다. 그저 담벼락일 뿐이다. 그 담벼락이 돈을 많이 들여서 조성을 했건, 아니면 그저 집에 있는 진흙덩이 조금에 이웃집에 있는 버린 기와 몇 장을 얻어다가 했건 그냥 담벼락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사람보다도 훨씬 좋단 생각이다.



담벼락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두 곳의 담벼락. 하나는 돌담 위에 수세미가 열려 나뭇가지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하나는 언제나 거기 붙어 있었다는 듯 그렇게 담벼락에 붙어있는 도판담장이다. 이렇게 볼 것이 많은 길을 걸으면서, 왜 우리는 이런 것에 인색하게 굴까? 그것은 바로 소통을 할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주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며 글 소재 하나는 괜찮은 것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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