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소중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30년 가까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한 문화재들을 저장해 놓은 3,000장 가까운 CD이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요즈음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다. 양장본으로 인쇄를 한 책이 아니라서, 볼품이야 없지만 나에겐 그 어떤 책보다도 소중하다.

 

<하주성 기자의 생태교통 30일간의 기록>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책은, 9월 한 달 동안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생태교통 수원2013’의 현장인 행궁동 일대를 누비면서 이런저런 것을 기록한 책이다. 얼마 전 수원시청을 들렸더니 정책홍보담당관실의 SNS팀이 만들었다면서 건네준다. 한준수 팀장이하 여러분들이 고생을 했단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벌써 생태교통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참 세월은 덧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 가버린 만큼이나, 생태교통의 그 현장이 차츰 잊혀가고 있을 때이다. 그런 즈음에 꼼꼼하게 편집을 하고, 직접 프린터로 뽑아 제본까지 마친 책이다. 세상에 단 한 권 밖에는 없는 책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생태교통 수원2013’9월 한 달. 참 무던히도 날이 더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오듯 한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행궁동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겨드랑이고 어디고 땀띠가 나 짓무를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을 생태교통과 함께 생활을 한 이야기들이다. 책을 받아들고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읽어간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블로거에게 온 편지 한 장

 

그리고 엊그제인가 문 앞에 편지 한 통이 떨어져 있다. 발신인을 보니 수원시이다. 무엇인가 헤서 열어보니 염태영 수원시장님의 편지가 한 통 들어있다. 화성문화제 기간 중에 팔도 파워쇼셜러들이 수원을 찾아 화성문화제 이것저것을 포스팅 한 것을, 역시 SNS팀에서 책자로 만들어 시장님께 드렸다고 한다.

 

지난해와 올해 수원시는 미디어 다음의 주관으로, 팔도 파워쇼셜러들 10명이 찾아와 수원의 곳곳을 누볐다.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수원에 대한 기사를 송고를 하는 방법으로 수원을 알렸다. 수원에서 가쳐간 곳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블로그를 보고 찾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일인 미디어의 꽃이라고 하는 블로그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수원은 SNS의 선두주자이다. 그만큼 대세에 발 빠른 대처를 한 셈이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SNS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게 된다. 그 중에서 블로그는 오래도록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요즈음을 미디어세상이라고 하는가보다. 사람들에게 전달체계를 잘 이용하는 파워블로거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효과는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태교통과 제50주년 수원화성문화제. 그 기간 동안 참 많이도 힘들었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 그 숱한 사연들을 담아 낸 책자 한권이 책꽂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다. 가장 작은 것이지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은, 아마도 열심히 한 흔적이 아닐는지. 이런 행복이 잦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앞으로 화석연료가 고갈될 것을 대비해, 무동력 이동수단으로 이용해서 생활을 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기록은 기록을 맡은 사람들의 몫이다. 시민기자들은 생태교통 현장인 행궁동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일’들을 기사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태교통 수원2013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기자들이 할 일이란 단순히 기사만을 올려, 사람들에게 홍보만 하면 되는 것일까? 생태교통이 시작한지가 벌써 22일 째이다. 오늘까지 합해 앞으로 폐막일인 10월 1일까지 꼭 10일이 남았다. 그 10일 동안에 많은 행사가 준비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행사는 바로 제50주년을 맞이하는 수원 화성문화제이다.

 

 

화성문화재와 맞물린 생태교통

 

화성문화제는 올 해로 반백년을 맞이했다. 참 길고도 긴 세월을 화성문화제는 세상에 수원과 수원사람, 그리고 화성과 문화 등을 알렸다. 그 화성문화제가 생태교통의 끝자락과 맞물려 있어, 그 기간 동안에는 수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생태교통을 찾아 온 사람들이 60~70만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추세라면 처음에 65만 명 정도가 다녀 갈 것이라고 했던 생태교통 관람자수가 100만을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생태교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생태교통은 단순히 기록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생태교통은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그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자들의 기록이 중요한 이유

 

물론 생태교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동력 전기 차나 자전거 등을 이용하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이동수단을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 기록 또한 중요한 일이다. 많은 이동수단들을 어떻게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생태교통 안에는 그런 것 이외에도 많은 기사거리들이 있다. 행궁동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변화, 행궁동을 찾아 온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야기들이 날마다 생태교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로 22일 째 생태교통 현장에 나와 있다. 물론 개막 이전부터 나온 것을 따진다고 하면 벌써 한 달이 넘게 생태교통 현장인 행궁동을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생태교통에서 촬영한 사진만도 천여 장에 이른다. 그 모든 것이 생태교통의 자료들이다. 기자란 다만 그것을 보고 기사를 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소소한 이야기들도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기사화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태교통의 재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이 생태교통에 대한 많은 기사를 올린다. 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기록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생태교통이라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의 일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00여명이 넘는 시민기자들이 생태교통 현장을 누비면서 기록을 했다고 치면, 그 얼마나 대단한 자료가 될까?

 

앞으로 남은 10일. 더 많은 시민기자들을 생태교통 현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현장을 뛰며 쓴 기사들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생태교통을 만나러 행궁동으로 모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중에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시민기자들의 발품으로 인해 기록이 되어, 생태교통의 자료로 남는다고 하면 얼마나 뿌듯할까? 남은 10일 동안 최선을 다해 생태교통을 기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귀부란 비석받침을 말한다. 비를 세울 때는 밑에 비석받침은 거북이의 몸체를 이용한다. 신라시대의 귀부는 거의가 거북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치면서 귀부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몸체는 거북이의 몸체에, 얼굴은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비란 어떤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거나, 벌어진 일을 적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기에 비석받침인 귀부는 딴 석조물에 비해 상당히 무겁게 조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귀부는 비석의 받침으로 이용을 하고, 그 위에 비를 세우게 되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용을 조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비의 형태이다. 그러나 예전 비의 모습을 보면 이런 통상적인 비 받침의 형태를 벗어나는 것들도 있다.

 

 

머리가 비뚤어진 귀부, 무슨 이유인가?

 

부여군 부여읍에 자리하고 있는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는 많은 석조물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탑과 석조불상 등, 그리고 각종 석물로 된 옛 자료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그 중에 귀부가 보이는데,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비석받침과는 동떨어진 모습들이 보인다. 한 마디로 해학적이기까지 하다.

 

서천군 군사리에서 발견이 된, 고려시대인 11~13세기 조성된 귀부가 있다. 거북의 등껍질인 육각형의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그리고 등에는 육각형 문양 외에 나뭇잎과 같은 무늬가 둘러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물인 구례 연곡사 동부도에는 날개와 같은 조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서천 군사리의 귀부 등에는 나뭇잎과 같은 조각이 보인다.

 

 

얼굴의 형태는 고려시대의 귀부에서 흔히 보이는 험상궂은 용의 안면이 아니다. 그렇다고 거북이의 안면도 닮지 않았다. 얼핏 보면 장승의 해학적인 모습과도 같은 모습이다. 거기다가 얼굴이 똑바로 놓이지도 않았다. 약간은 삐뚤어진 형태가 해학적이다. 발은 거북이의 발이라기보다는 구부러진 것이 용의 발을 닮았다.

 

누워버린 귀부의 얼굴

 

박물관 한편에는 많은 석조물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 이곳에 잇는 귀부는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몸체는 네모나게 조형이 되었으며, 등에 흔히 표현을 하는 육각형의 귀갑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몸체를 네모나게 조각을 했는데, 목은 한편이 땅에 닿도록 비틀어져 있다. 얼굴은 거북도 용도 아닌 해괴한 모습이다.

 

 

이런 비석받침과는 대조적인 비석받침도 있다. 조각이 난 채로 전시가 되어있는 사실적인 비 받침은,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 터에서 발견이 된 비석받침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보양이 사실적이면서도 힘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귀부의 형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각의 형태와,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형된 형태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저 재미로 보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귀부이긴 하지만, 그 안에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단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석받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혹 대단하지 못한 세상을 산 것에 대한, 스스로의 자탄 때문에 이런 조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당시 지금의 세대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제대로 보려고 그렇게 누웠을까? 빗뚫어지고 고개를 돌려버린 비석받침. 그런 비석받침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기회를 삼는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동문인 창룡문 성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은 누가 했으며, 석수는 누구, 그 외에 몇 명이 참여를 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실명제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성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기록을 해 두었다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적힌 기록을 보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 아무개가 언제부터 어디서 일을 했는지, 또 임금은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정조의 애민주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적은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에도 보인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을 한 화성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돌 하나 목재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해 놓았으며, 일일이 그림을 그려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에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도 꼼꼼히 기록을 해 놓았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형태가 여러 가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에 지워져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성벽의 기록으로 보아, 모든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머릿돌에 해당하는 회사명을 적어놓듯, 그렇게 책임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밥숟가락의 숫자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 단청에 들어가는 물감은 물론, 가마니와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등 화성성역의궤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고 적고 있다.  

 

 

 

2달만 일을 하면 초가집을 한 채 살 수 있어

 

정조는 화성 성역을 하면서 각 처에서 올라온 인부들에게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 축성 및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의 축성시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735냥4전3푼이었다. 이 가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게 2만4419냥7전으로 19%, 목수들에게는 1만3381냥으로 10.4%, 대장장이는 1만745냥8전7푼으로 8.3% 등의 순이었다.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 지급한 돈이 11만7520냥 8전7푼이었으며,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561냥5전7푼이 지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817냥8전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와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이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부들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화성이 딴 성과는 달리 치밀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명제와 함께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냥 겉도는 화성이 아니라, 화성을 하나하나 보아가면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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