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은 그 규모면으로는 국보 제224호인 경복궁경회루와, 국보 제304호인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한다.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세병관은 <통영지> 공해편에 보면,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인 1604년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2박 3일의 통영답사 2일째인 10월 13일 오후에 찾아간 세병관. 통영시 문화동의 이 일대는 사적 제402호인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예전 통제영은 전각이 100여 동이 서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이 있던 대규모 병영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통제영

 

통제영의 중심에 있는 세병관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경상, 전라, 충청 3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현재 이곳 통제영은 복원계획을 세워 많은 건물이 세병관 주변에 새로 들어서고 있다.

 

290년 동안이나 3도 수군을 지휘하며 우리나라의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통제영. 그러나 고종 32년인 1895년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지고,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기 말살정책을 펴 지역의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민속 등을 훼파할 때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세병관이 남아있어 고맙다

 

세병관 주변은 공사 중으로 복잡하다.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요란한 공사장을 피해, 세병관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들어선다. 멀리서부터 그 위용을 보았기에 좀 더 자세히 세병관을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병관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았다. 기단의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중앙 뒷면에는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우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래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의 또 다른 이름 ‘괘궁정’

 

세병관 밖을 한 바퀴 돈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측변 벽 위편에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왜일까? 대개 이런 군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 아니던가? 반대편에도 역시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림도 많이 퇴색하고 벽이 높아 자세히 식별을 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비천인상이다.

 

세병관 전각 안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바깥 세병관의 현판이 걸린 안쪽으로 작은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괘궁정(掛弓亭)’, 말 그대로라면 활을 걸어두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이 군영의 중심이었으니 이해가 간다. 이렇게 삼도수군을 호령하던 곳인 세병관에서 만난 작은 현판하나가, 선조들의 마음의 여유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일이 하나하나를 짚어보아야만 한다. 그저 겉으로만 후다닥 보고 다음 일정을 따라갔다고 하면, 나중에 꼭 후회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때 삼도 수군을 호령하던 세병관, 통제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는 날 그 위용을 만나러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 중 보물 제104호인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수많은 문화재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상당히 번창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층석탑은 보원사지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추정하고 있으나, 보원사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근 용현리에서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무게감을 더하고 있는 오층석탑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탑 중 하나이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조성한 오층석탑은,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겼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화로 인해 사장상의 모습은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윗기단은 양편에 양우주를 돋을새김하고 가운데는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각 면에 새겼는데, 조각은 세심하지는 않지만 힘이 있어 보인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팔부신장은 인도의 고대불교 이전부터 있던 신격이불교에 수용된 신들이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중상

 

팔부신장은 흔히 ‘명중팔부’ ‘천룡팔부’ 등으로도 불린다· 불국토를 수호하는 팔부신장은 경전의 내용에 따라 여러 설이 있다. 경전상으로도 여래팔부중과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팔부중은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중생을 의미하는 여래팔부중을 말한다.

 

 

 

 

즉 천과 용, 야차와 건달바, 아수라와 가루라, 그리고 긴나라와 마후라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천왕에 소속된 팔부중은 건달바, 비사사, 구반다, 벽협다를 비롯해 용과 부단나, 야차와 나찰 등을 말한다. 석탑의 기단부나 불화 등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팔부신장은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계 양식을 모방한 고려석탑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양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이며 귀퉁이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이 지역은 옛 백제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석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머리장식받침인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 듯 하지만, 장중하고 기단과 몸돌의 균형이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만날 때이다. 문화재 하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먼 길을 걸어야하는 나로서는, 보원사지와 같은 곳이 정말 즐거울 수밖에 없다. 오층석탑 주변에 즐비하게 널려진 보물들과 석재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걸어 온 길의 피로를 잊는다.

경남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7-1번지 옛 절터에는, 고려시대의 석탑 한 기가 남아있다. 이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여러 장의 판석을 이용해 상, 하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 보물 제379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晉州 妙嚴寺址 三層石塔)’으로 불린다.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이다.

지난 6월 11일에 찾아간 진주 수곡면 효자리. 마을을 돌다가 만난 묘엄사지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높이 4.6m 의 삼층석탑이다. 이 탑이 세워져 있는 곳을 ‘탑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탑 외에도 또 다른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 주위에는 주춧돌과 석주, 부도의 덮개돌 등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당시 묘엄사는 상당히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서 있는 묘엄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379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엄사 ‘명’ 기와편이 발견돼

현재 삼층석탑이 서 있는 주변정비를 하던 2008년에, 이곳에서 묘엄사 ‘명’ 기와편이 발견이 되어 이곳의 절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탑 맞은편에도 불상과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이탑 형식의 큰 절이었을 것이다. 이 묘엄사지 삼층석탑의 위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폭이 넓은 양우주와 탱주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기단의 덮개돌을 얹었으며, 한가운데 2단의 고임을 깎아내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양우주와 가운데 탱주가 조각되어 있다. 삼층석탑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층마다 각각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하였는데, 1층의 몸돌은 지나치게 높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과 안정감을 잃었다. 몸돌인 탑신에는 기단에서와 같이 양편에 폭이 넓은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겼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석탑

이 묘엄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에는 1층의 서쪽 면에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 모양과 고리가 얇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조각도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넓이에 비하여 두꺼운 편이며, 밑면받침은 1층과 2층이 4단씩이고 3층은 3단으로 줄어든다.

지붕돌은 두껍고 낙수면의 경사가 급해 보이며, 처마의 선은 위아래가 모두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 끝에서 위로 완만하게 솟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어 거친 느낌이 들며, 각 부의 짜임새나 제작수법도 둔화되었다. 하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 제작시기 등을 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정비를 마친 삼층석탑 주변에는 간주석과 덮개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쌓여있다


나뒹굴고 있는 보물 표지석

탑을 돌아보고 난 뒤 곁에 쌓여진 석물을 돌아본다. 석등의 받침석과 간주석, 덮개석과 같은 석재들이 놓여있다. 그 상태로 보아 화사석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삼층석탑 옆에 세워둘만한 훌륭한 석조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뒤편에 대리석으로 조형이 된 석재 하나가 보인다. 이런 곳에 웬 대리석 석재인가 싶어 다가가보니 글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보물 제379호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이라고 한문으로 적혀있다. 석탑 앞에 세웠던 안내표지석이다. 이곳을 정비했다고 적혀있는데, 정작 안내를 하는 표지석은 그대로 뽑아내 석물들과 함께 한 옆에 쌓아놓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물론 안내판이 있으니 보물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내표지석이 한 옆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이 볼썽사납다.


석재들을 쌓아놓은 안에 보물 표지석을 함께 쌓아놓아 볼썽사납다


묘엄사가 언제 세워진 절인가는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이 탑이 서 있는 인근에서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돌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아 아마도 상당히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삼층석탑 한 기와 몇 개의 석물만 그 자리에 남겨놓고 있는 묘엄사. 과연 언제 적 누구에 의해 창건이 되었으며, 언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답답한 일을 당할 때마다 한숨만 터져 나온다.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의 훼손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범어사 사천왕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가운데 전소가 되어버렸다. 뉴스를 통해 불이 타 무너져내리는 천왕문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외국의 열강 등에 의해 수도 없이 찬탈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같은 민족에게까지 그렇게 훼파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리다.

도대체 이 나라사람들은 종교가 다르다고, 혹은 세상이 마음에 안든다고 문화재에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이참에 문화재보호법을 더 강력하게 제정을 해,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이런 날 꼭 소개하고 싶은 문화재 한 점이 있다. 바로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 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탑

승안사지 삼층석탑은 우선 보기에는 매우 둔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저 첫눈에 보이는 느낌은 조금은 시골스런 남정네를 연상케 한다.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지역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석탑이기 때문인가 보다.

기단부에는 비천인과 불, 보살 등의 조각이 되어있다. 이 모든 조각들은 무릎을 꿇은 형태로 되어있는 점도 특이하다. 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4.3,m 정도로 길쭉한 편이다. 그러한 점이 조금은 불안한 듯하지만, 투박한 탑의 형상이 그런 불안감을 조금은 해소시키고 있기도 하다. 자칫 탑의 조형의 비례가 맞지를 않아 중심이 흐트러질 뻔한 것을, 투박한 무게로 이겨내고 있다고 보겠다.




자리를 옮긴 석탑의 놀라운 조각예술

이 석탑은 1962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올 때, 홍치 7년인 1494년에 중수를 한 기록이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승안사는 당시에 존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도 탑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은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셈이다. 당시 1층 몸돌 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서는 원통형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우주와 탱주를 새긴 위층 기단부를 놓았다. 위층 기단에는 불, 보살, 천인상을 조각을 하였으며 덮개돌에는 연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기단부의 덮개돌은 층이 없이 평평한 돌을 위로 불룩하게 돋아 조각을 하였다.



일층 몸돌에는 사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천왕상의 조각이 일반적인 탑에서 보이는 사천왕상과는 다르다. 사천왕상의 발밑에 보면 목제 사천왕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무엇인가를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각기법과 장엄한 모습 등이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탑 하나에도 장인의 숨결이

탑을 돌아보고 석불을 돌아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보존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인의 집중한 정신이 그 안에 함께 내재되어 있기에,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은 아닐까? 오랜 풍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렇게 한 자리에 버틸 수 있었음은, 보이지 않는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몸돌에 새긴 사천왕상은 장중하다.

이번 화재를 거울삼아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일제 점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매번 입으로만 앵무새가 따라하 듯, 문화재의 소중함을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지켜 낸 문화재들은 한번 잃으면 그만이다. 그런 자산을 이렇게 바보스럽게 잃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 하왐사상의 중심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이다. 신라 후기에는 도선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회엄사가 더욱 그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화엄사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사의 사세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가 국교를 불교로 했고,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화엄사 일주문 밖에는 큰 창고를 짓고, 경상도와 잔라도에서 실어오는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전각들이 중창되었다.



각황전 한편에 자리한 사자탑

화엄사 각황전 앞에 난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화엄사 사자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한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태를 사찰에서는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기단은 이층으로 꾸며졌으며,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받침돌을 이고 그 위에 비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은 각황전 뒤 효대에 있는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했으니, 조각수법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성시기도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탑이 독특해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은 2단이다. 아래층 기단은 문양이 없는 단순한 석재를 이용해 꾸며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모습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의 석조물인 듯 하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비스듬히 밖을 바라다보고 있으며, 그 표정이 각각 다르다.

네 마리의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마 불교적인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이런 조각을 보아 이 사자탑ㅁ이 사리탑이었을 것이란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몸돌의 받침돌을 이고 있는데,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몸돌에는 네모나게 판 후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무엇에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자탑. 아마 당시에는 소중한 절의 기물로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하지만, 아직은 지식이 모두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깝다. 사자탑을 돌아보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짧기만한 지식을 어찌하랴.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더 지체를 못하고, 아쉬움으로 뒤만 연신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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