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이 떨어지자, 전국은 그야말로 피바다로 변해버렸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에서 천주교 신자 6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관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잡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굶주림에 죽어간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더욱 이러한 난리 통에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 억울하게 박해를 당한 예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전북 익산군 여산면. 이곳에는 병인박해 때 생명을 잃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두 곳의 성지가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를 한 천주교 신자들의 죽음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교수형과 참수는 물론이고, 성벽 위에서 거꾸로 밑에 있는 바위위로 떨어트리기도 했다. 이러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를 불러 오게 한 요인이 되었다.

백지사형을 행한 여산동헌 아래뜰

한지를 덮어 질식시킨 백지사(白紙死)

백지사란 말 그대로 백지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형벌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덧붙여 질식을 시켜 처벌하는 형벌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소방서 앞에 자리한 여산동헌. 이 동헌의 앞뜰에서 바로 이 백지사를 실행하였다. 일명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하는 이 백지사는 호흡을 할 수 없어 받는 고통이 길어 오히려 더 심한 형벌이라고도 한다.

동헌의 아래 뜰인 이곳에는 당시 백지사를 당한 얼굴의 모형이 십자가 앞에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건물의 주추나 축대를 쓰였을 장대석을 모아놓았다. 딴 곳의 성지가 여러 가지 형태로 꾸며 놓은 것에 비해, 간단하게 성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과 모형조각만 땅에 놓여있다. 아마 이곳이 여산동헌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인가 보다.



얼굴의 모형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손을 뒤로 묶고 말뚝에 매달아 백지를 얼굴에 덧 씌었다고 한다. 이들의 솜옷은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는데, 배가 고파서 옷의 솜을 다 빼서 씹어 먹었다는 것이다. 동헌건물의 옆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 있어 박해사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겁 덮어 질식을 시키는 백지사의 형태(위)

한 가족 6명 등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성지

여산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 도로변에 보면 또 한 곳의 성지가 있다. 일가족 6명 등 모두 25명이 순교한 숲정이 순교 성지. 이곳은 금산과 고산, 진산 등지에서 붙잡힌 신자들이형을 당한 곳이다. 그 중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 17명이나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되고 논이 들어차 있지만, 당시는 이곳이 숲이 우거져 ‘숲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은 형장에서 칼을 풀어주자, 배가 고파 풀을 마구 뜯어먹었다고 전한다. 기록상으로는 25명이 이곳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지만,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숲정이 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정비가 되었다.

숲정이 성지 정경

숲정이 성지로 들어가니 한편에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으로 시작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심산 궁곡에 숨어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에 끌려와 그 중25명이 진리의 증거자로 목숨을 바쳤다. 특히 당시 고산 넓은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이 안내판의 곁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명단을 적은 또 하나의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순교자들을 보면 김성첨(토마스 62세), 김명언(안드레아 62세), 김정규(야고보 47세), 김정언(베드로 23세), 김홍칠(마티아 19세), 김찬여(요한), 김베드로(19세), 오유리안나, 박베드로(42세), 이필립보(19세), 오윤집(다대오 39세), 김성화(야고보 52세), 이서방, 손막달레나(27세), 한정률(요한 27세), 박성진의 아내, 전루시아(35세), 장윤경(야고보 37세), 전마리아(50세), 이영화, 박성실(요한), 김윤문, 박운겸, 박도미니코, 송가롤로(50세) 등 25명이다.




두 곳의 성지를 답사하면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순교를 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과연 그 마음을 어찌 읽을 수가 있을 것인가? 다만 그 순교한 분들의 굳은 믿음만은 조금은 이해할만하다. 간간히 언론에 오르내리는 소문이 무성한 종교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더욱 숭고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낸 분들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8월 29일은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집은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년 1차 한일협약이 체결이 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생가지 앞마당에는 선생의 앉아계신 모습이 있다. 생가지의 대문채와 안채(아래)

국지성 호우가 미친 듯 쏟아지고 난 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방문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는 요즈음 들어서도 처음인 듯하다. 마치 국치일의 아픔을 씻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또 다른 국치를 만들고 있는 윗분들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 찾은 곳이다.

깨끗이 정리된 생가지 ‘옥의 티’가 즐비해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ㄱ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ㄇ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ㅁ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안방문은 도대체 저런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한 것일까? 그리고 한편에 붙은 마루방은 또 무엇일까

이 집을 돌아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생가지에 새롭게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가급적이면 예전집의 형태로 복원을 했어야만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면,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ㄱ 자형의 안채가, 그리고 한편에는 광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된 집은 도대체 그 비슷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가 않다.

생가지의 집에는 무슨 옥의 티가 있을까? 우선 안채의 좌측 끝에 있는 개방마루방이다. 이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해 낸 것일까? 개방마루방을 꾸미려면 마루를 높여 정자와 같이 앞뒤로 개방을 했어야만 했다. 이런 식의 마루방은 전국을 돌면서 한옥을 보았지만, 내 안목이 좁아 그런지 본 적이 없다. 만일 이것이 광을 들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판자문을 달아야만 한다. 

뒷벽에 난 창문을 보면 이것은 방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광일 경우 뒷벽도 막아야하고, 상단에는 까치구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사랑방과 안방의 문이다. 대개 안방의 문은 네 짝 짜리 미닫이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커다란 문 한 개와 작은 문 한 개를 만들어, 위로 올려 붙들어 매게 만들었다.



뒤편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도였나?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있는 고장에서, 이렇게 흉내만 내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뒤편으로 돌아갔더니 우물이 보인다. 맑은 물이 차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다가갔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물 안에는 자갈만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찾아와 들여다보고는 하는 우물인데, 지하수라도 끌어다가 채웠으면 좋았을 것을. 역사의 한 인물이 살다가 간 흔적이 있는 집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만들어 놓다니. 일제에 의해 수도 없이 조작이 된 우리의 역사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조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몸 받쳐 온 선생의 생가지에, 이런 집이라니.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선생의 곁에 가서 앉았다. 쏟아지는 폭우에 젖은 선생에게 정말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또 다른 슬픔을 이곳에서 보고 가네요.” 선생의 손을 잡아본다.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왈칵 눈물이 솟는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집을 돌아보고 난 뒤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에
비에 젖은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생님의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는 수령 500년이 지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마을을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이 소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처진 소나무로 높이는 16m이며, 둘레는 2.95m에 가지의 폭은 21m 정도이다.

이 소나무는 마치 등 굽은 사람처럼 서 있는데, 목 부분이 굽어져 가지가 마을 쪽으로 뻗쳐 처져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풍천 노씨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을 때 심었다고 전한다. 조국의 광복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 아래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비는 지신밟기를 했다고 한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수령 500년의 처진소나무

죽은 아들이 아이를 점지해준 종암우물

소나무 아래에는 마치 계란같이 생긴 바위와 우물이 있다. 이 바위를 종암이라고 부르며, 아래에 있는 우물을 종암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에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 말엽 소나무가 서있는 개평마을에는 2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금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40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



목 부분이 굽어진 처진 소나무는 노씨들이 지곡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두 부부는 귀한 아들이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에, 앞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50이 다 된 부인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병이 들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 ‘어머니 나 종암우물에 있어. 왜 데리러 안와’라고 했다. 부인은 집 가까이에 또 다른 우물이 있어, 종암우물까지는 물을 길러 가지 않았으나, 아들이 보고 싶은 생각으로 혹시나 해서 종암우물로 가서 우물주위를 돌았다. 몸이 약해진 부인은 우물을 돌다가 쓰러졌으나, 종암우물의 물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우물을 돌고는 했다.


아들을 점지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종암과 우물

먼 곳이지만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인은 날마다 종암우물을 떠다 먹으며 그 주위를 돌았다. 그런데 도저히 완쾌할 것 같지 않았던 병약한 부인이, 3개월 후에는 완쾌가 되었으며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임신이 된 선비의 부인은 49세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오직 아들을 보기를 바란 부인의 정성이 하늘을 닿아 아들을 본 것이다.

이 소문은 인근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부터 마을에는 낯선 여인들이 찾아와 종암을 안고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을 간절히 빌며 종암 주위를 돌면서, 우물 물을 마시고는 했다는 것이다.

지곡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전통마을이다.

지곡마을은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고택을 비롯한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수령 500년이 된 처진 소나무와 종암. 아마 이 외에도 이 마을을 돌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등굽은 소나무는 마을을 향해 옛날 옛적 전설이라도 들려주려는 것인지. 마을을 향한 가지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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