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도는 경기도 안산시에 속해 있는 섬이다. 안산시는 공업단지가 가장 많은 곳으로 변해, 문화재들을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도 몇 점의 소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전역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안산시 대부북도에는 쌍계사라는 전통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쌍계사하면 하동 쌍계사를 떠올리지만, 그 외에 여러 곳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들이 있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널찍한 경내에 봄기운이 완연해

 

4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하여 답사를 떠났다. 안산시에 소재한 몇 곳의 문화재와 쌍계사, 그리고 대부도와 연결이 되어있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선재도와 영흥도를 둘러볼 계획으로. 안산시 별망성지를 돌아 찾아간 쌍계사. 극락보전을 중심에 두고 한편에는 삼성각이,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약수가 나온다는 용바위를 보전하는 전각이 있다.

 

너른 마당에는 봄볕이 완연하다. 약간의 찬바람이 불고는 있지만, 절을 찾아가는 산길에는 벌써부터 농사꾼들의 작업이 한창이다. 최초로 창건할 당시에는 경기도 남양부지 서령대부도였다는 대부북도 쌍계사. 쌍계사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 목조여래좌상과 제182호인 쌍계사 현왕도, 그리고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인 아미타화상도를 소장하고 있다.

 

 

신비한 용바위, 유리 밑으로 물길이

 

극락보전에 들려 참례를 한다. 언제나 사찰을 들어서면 먼저 하는 의식이다. 꼭 돈독한 신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문화재가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서 용바위가 있다는 전각을 살펴본다. 앞에는 병을 낫기를 기원하는 촛불들을 켜 놓았다. 용바위의 물길이 흐르는 곳은 유리로 막아 놓았다.

 

방석이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물길 위에서 앞에 걸린 용왕신의 탱화를 보고 절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금은 섭섭한 생각이 든다. 그 몸에 좋다는 물을 한잔 떠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 물을 발견한 것은 정수암이라는 절을 처음으로 창건한 취촉대사가 발견을 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산 중턱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용 다섯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취촉대사가 그 자리를 파보니 용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여겨 그 자리에 정수암이라는 암자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물에는 철분 및 탄산수가 많아 위장병 및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약수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쌍계사의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학생들의 자연학습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하다. 개구리가 동면을 깨고 나온다는 경칩을 하루 앞둔 5일 찾아간 대부북도 쌍계사. 그곳에는 이미 봄이 발치 앞까지 와 있었다.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에 의상조사가 지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조선의 비운의 왕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감봉되어 유배당할 때, 절 이름을 노릉사(老陵寺)’로 고쳤기도 했다. 후에 단종의 능인 사적 제196호인 장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영조 2년인 1726년에 보덕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덕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절이다. 영월읍내서 찾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장릉을 찾아가는 길에 들릴 수 있는 절이기 때문에, 큰 불편을 겪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이 보덕사에는 수령 600년 이상이 된 느티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긴 역사의 질곡을 그대로 받아들인 곳이란 생각이다.

 

 

화려한 공포가 돋보이는 극락보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0이 소재하고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인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에 운허선사와 원경국사가 늘려 지었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현판은 김규진이 썼다. 현재 보덕사의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갖추고 있는 건축물이다. 아마도 고려 때 지은 극락보전은 유실이 된 듯하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원래 아미타불은 법장비구였다. 아미타불을 다른 명칭으로 무량수여래불이라고도 부른다. 아마타불은 서쪽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며, 석가모니가 살아생전 그의 부친인 정반왕이 아미타불에 의지하여 극락세계를 가실 것을 권고한 일화는 유명하다.

 

보덕사, 왜 슬픔이 일까?

 

극락보전으로 들어가 참배를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절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중심 전각을 찾아보는 것이 일이 되었다. 20년 넘게 다닌 답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할 수밖에. 그런데 갑자기 슬픔이 말려온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도. 아마 이곳이 단종의 원찰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사실 보덕사를 찾아가기 전 먼저 장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청령포며 관음성, 자규루까지. 그 모든 곳에 단종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참이나 그렇게 맥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가 보다. 인기척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밖으로 나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신신각, 사성전. 해우소까지 한번 들러보지만 쉽게 아른 가슴이 가시질 않는다. 산자락 밑에 보이는 작은 부도 하나가 마음을 더 쓸쓸하게 만든다. 도대체 누구의 부도일까? 부도란 그 절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입적하신 분의 사리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 부도는 어느 스님의 것인데 이리 초라한 것일까?

 

 

올 봄에는 영월로 가고 싶다.

 

영월은 서너 번을 답사를 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을 때마다 비가 뿌렸다. 왜 그리도 철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갈 때마다 비가 뿌렸는지 모르겠다. 영월을 들어설 때까지도 말짱하던 날씨가 영월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비가 왔다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월은 늘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올 봄에는 영월을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이미 다녀온 지가 수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날을 잡아 영월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싶다. 눈만 감아도 여기저기 돌아볼 곳들이 눈에 삼삼하다. 그곳에 가면 또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해가 지나며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으려는지.

 

서울 성북구 돈암동 595 소재한 흥천사. 흥천사는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을 정릉으로 정한 후 세운 사찰이다. 당시 이 절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170여 칸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흥천사, 이 절은 어릴 적에는 정릉 신흥사라고 불렀다.

 

정릉 신흥사라고 한 까닭은 이 절이 정릉의 원찰이었고, 이름이 신흥사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이 근처에서 살던 나로서는 이 신흥사가 늘 벗들과 함께 뛰어놀던 놀이터였다. 지금도 삼각산 흥천사라고 하면 왠지 생소하다는 기분이 든다. 그것보다는 어린 시절 우리가 부르던 정릉 신흥사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곳이다.

 

 

조선 태조 5년에 창건한 신흥사

 

신흥사는 조선조 태조 5년인 1396년에 왕실의 발원으로 지은 사찰이다.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사명을 신흥사라고 하였으며, 극락보전에 태조 왕궁의 궁중원불인 42수 관세음보살존상을 봉안하였으며, 국제를 거행하던 절이었다. 이 절은 왕실의 위엄을 모아 나라의 명찰이라 하여 조계종의 본사로 명명하였다.

 

1409년 선덕왕훙의 능을 숭신방 사아리로 이전하고 흥천사도 능방에 소암으로 이건해 이름을 신흥사로 불렀다. 중종 5년인 1510년에는 화재로 인해 혜진하고 대종은 덕수궁에 보관되어 왔다. 정종 18년인 1794년 성민화상 등의 발원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철종 4년인 1853년 계장화상의 발원으로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철종 6년인 1855년 순기화상의 발원으로 명부전을 건립하였으며, 고종 22년인 1885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다. 현재 흥천사에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대방, 삼성각, 종각, 칠성각, 용화전, 연화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흥천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보전은, 10겁 이전에 성불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철종 4년인 1853년에 계장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정면 3, 측면 3의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극락보전의 정면에 달아 낸 창호의 조각인 상당히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의 건축물로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1985125일 극락보전과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이 된 명부전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법당으로, 철종 6년인 1855년에 순기스님이 세웠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민간신앙으로서, 조선시대의 사찰에는 거개가 명부전이 건립되었다.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시왕을 거느린 지장보살상을 모시고 있고, 그 뒷면 벽에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가 걸려 있다. 흥천사 명부전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진 이 법당은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경내를 뛰어다니면서 노닐던 신흥사. 정릉신흥사는 삼각산 흥천사라는 다른 이름으로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은, 정겨웠던 이름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무엇이 대수이랴. 어차피 그곳에 많은 조형물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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