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아의 깁흔 뜻을 뎐하나니 긔 뉘신고(風雅深意 傳者其誰)

고됴를 됴하하나 아나니 전혀 업내(古調雖自 愛知者少)

졍셩이 하 미망하니 다시 블너 보리라(正聲何微 茫欲更吟)

 

내 말이 긔 어니 몰고 또 모라라(我馬維騏 載馳載驅)

질고를 믈을지니 원습을 갈힐소냐(詢其疾苦 奚憚原濕)

셩은이 지듕하시니 못갑흘가 하노라(聖恩至重 惟恐不能酬)

 

위의도 거룩하고 녜모도 너를시니(威儀盛大 禮貌寬兮)

희학을 됴하하나 학하미 되올쇼냐(善戱謔兮 不爲虐兮)

아마도 성덕지션을 못니즐가 하노라(盛德至善 終不可諼兮)(하략 김광섭 역)

 

 

권익륭이란 고성군수가 지은 연작시이다. 권익륭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시조작가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대숙이다. 호는 하처산인으로 숙종 34년인 1708년에 양성(안성시) 현감을 지낸 후, 1710년 간성군수로 부임을 했다. 이 시는 <풍아별곡>이라고 하는 권익륭이 1710년 간성군수로 있을 때 지은 모두 6수의 연작시이다.

 

교주가곡집에 실린 권익륭의 풍아별곡

 

이 내용은 고성군 현내면을 답사하고 난 뒤, 고성향토사연구회 연구위원인 김광섭 선생의 논문과 자료에서 취합한 글이다. 김광섭 선생은 고성지역의 향토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역의 향토사를 정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김광섭 선생이 보내 준 자료에는 1710년 간성군수를 지낸 권익륭에 대한 자료와 <고성화진포의 팔경과 시문학 고찰> 이란 선생의 논문이었다.

 

풍아별곡은 이 작품은 작가가 교방(敎坊)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즐길 때, 기존의 노래만 갖고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부르도록 하기 위해 지은 노래라고 한다. 풍아별곡의 첫 수에서는 고조(古調)와 정성(正聲)이 전하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이를 재현하여 보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그 다음부터 다섯째 수까지는 사람이 주연(酒宴)에서 갖추어야 마음 자세와 도리를 밝힌 다음, 마지막 수에서 인생은 무상하므로 생전에 후회 없이 놀고 즐기자는 뜻을 말하였다고 한다.

 

논두렁에 서 있는 소나무와 불망비

 

이렇게 권익륭에 대해 김광섭 선생을 통해 자세한 자료를 얻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를 답사하고 있는데, 마을 앞 논가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가 하도 아름다워 쫒아갔더니, 옆에 영세불망비가 한 기 서 있다. 하지만 불망비라는 각자는 보이는데, 그 위의 글씨가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던 차에 김광섭 선생을 소개를 받기에 이르렀고, 선생은 자신이 연구를 한 자료를 선뜻 보내주었다. 논가에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주변은 펜스를 쳐놓았고, 안내판에는 이 소나무가 수령이 150년 이상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나무의 모습을 보니 3~400년 가까이 된 나무처럼 보인다.

 

그 옆에 세워놓은 영세불망비. 군수였던 권익륭이 선정을 베푼 것에 대해 잊지 않겠다고 주민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비이다. 1711년에 이 불망비를 소나무 곁에 세웠다고 치면, 이 소나무의 수령은 이미 3백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불망비 때문에 이 소나무의 수령이 우리가 짐작한대로 맞아 떨어진 셈이다.

 

 

 

왜 이곳에 불망비를 세워놓았던 것일까? 이곳 현내면 산학리는 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불망비 앞을 지나쳐 금강산으로 오갈 때, 이 불망비를 보고 이곳에 선정을 베푼 권익륭 군수가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뜻이었다는 것. 이 불망비와 동일한 불망비가 안성시 양성면사무소 뒤편에도 한 기가 서 있다고 한다. 결국 권익륭은 지역의 방백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 가지 밑에 서 있는 권익륭 군수의 영세불망비. 각자는 다 흐려져 알 수가 없지만, 당시 주민들의 정성이 그 곳에 깃들어 있다. 이곳 산학리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300년 세월 그렇게 의지를 하면서 자리를 지켜 온 소나무 한 그루와 영세불망비 한 기. 그 모습에서 아주 오래 전의 역사 한 자락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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