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는 그 시기마다 삶의 척도를 재는 가치관이 다르다. 지난 과거에 삶을 이 시대에 맞추어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근본이니 뿌리라는 말을 쓴다. 무슨 시시콜콜한 말이냐고도 하겠지만, 그런 것을 지난 삶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인 절열양정씨지려가 있다. 작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에 節烈兩丁氏之閭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전각 안에 걸린 두 사람의 여인

 

말 그대로 하자면 두 사람의 정()씨가 굳건한 마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해 문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누구였으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한 칸의 정려각은 조선조 후기에 세운 전각이다. 주변은 흙을 조금 높게 돋우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좌우로 갈라 두 사람의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사람의 여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정씨이기 때문에 양정씨라고 표현을 했다. 이 정려각은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세웠으며, 그 뒤 순조 19년인 1819년에 고쳐 지었다. 단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양정씨 정려는 그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지난 47, 장수군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양정씨지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전각 하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눈길을 떼지말아야 하는 문화재 답사에서는, 그런 소소한 것도 확인을 해야만 한다.

 

죽음으로 가문을 지켜내다

 

이 두 사람의 여인은 정황(1412 ~ 1560)의 후손들이다. 정황은 조선 중기 전북 남원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이다. 자는 계회, 호는 유헌, 시호는 충간으로, 부친은 필산감역 정세명이다. 정황의 후손이라는 이 두 여인의 행적은 정려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안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현판과, 뒤편에는 행적을 기록한 현판이 보인다.

 

 

한 사람은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고, 스스로 물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했다.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의 사상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 시대적인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려에 써 있는 글귀를 보면 전각 안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절부라 기록을 하였으며, 사옹원 첨정 권백시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좌측에 적힌 것은 열녀라 적었으며, 성균생원 풍천 노세기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뒤편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뒤편에 걸린 편액에 적힌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다만 한 여인은 절부로 한 여인은 열녀로 기록해 절열지려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 두 분의 여인들은 그길이 스스로를 지키고, 가문을 지킨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랜 유교적 사고에서 온 행동이라고 일침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여성은 그길이 최선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각 앞에서서 머리를 숙이고, 두 여인의 명복을 잠시 빌어본다. 아픈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