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북상면 중산마을에는 지은 지가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고택 한 채가 있다. 주인인 임종호는 2~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는 구 가옥 곁에 새로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변 제각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은,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이 자신의 질부라고 하시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이 집은 치목구조나 여러 가지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조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르신은 120~130년 정도 되었다고 하신다. 솟을대문 안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 우측에 광채가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나란히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돌담으로 집 전체를 둘러놓았다. 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서 꽤나 잘 살았던 집안이란 생각이다.

 

 

다섯 칸으로 지은 사랑채의 풍취

 

사랑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그대로 쓴 집은 기둥을 모두 사각으로 치목을 하였다. 이런 치목의 방법이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목재들을 보아도, 지방의 목수들이 다듬은 손길이 아니다. 사랑은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아궁이를 두고, 두 칸 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누마루 한 칸과, 온돌방 한 칸을 계속 두고 있다.

 

우측 온돌방 앞으로는 누마루에 난간을 둘러 정자방으로 꾸며 놓았다. 사랑채 뒤편으로 길게 늘어선 광채는 중문채를 겸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채 옆으로는 담을 터 바깥으로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그 문을 통해 제각으로 드나든 듯하다. 광채는 우측 한 칸은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광채를 그리고 좌측으로는 뒤주를 삼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다시 한 칸의 방을 드린.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졌다. 아마도 사랑채 쪽의 방은 남자가, 안채 쪽의 방은 여자가 사용한 듯하다. 사랑채 방향의 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어, 남은 공간에는 활주를 대고 지붕을 내어 달았다.

 

안채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와 나란히 뒤편에 조성한 안채 역시 다섯 칸이다. 좌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안방, 윗방 그리고 대청마루 뒤편에 문을 달아 신주방으로 꾸민 듯하다. 맨 오른쪽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두르고 높임마루를 달아냈다. 임종호 가옥의 특징은 대청마루 뒤편에 마련한 신주방이다.

 

 

부엌의 뒤편에도 작은 부엌방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런 구성은 딴 곳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사랑채와 광채, 그리고 안채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조성한 임종호 가옥. 전체를 이으면 자 모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앞으로는, 안마당을 시원하게 만드는 정원이 있다. 그 정원 한 가운데 흙담으로 꾸민 굴뚝이 서 있다.

 

어르신 저 집의 마당 가운데 굴뚝은 사용하는 것인가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지.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으니 쓰지 않지만

그런데 왜 마당 가운데에 굴뚝을 마련했나요?”

낸들 아나 여기저기 연기가 나면 안 좋으니까 그랬나보지.”그럼 안채와 사랑채에도 굴뚝이 모두 저 가운데로 빠지나요?”

처음엔 그렇게 만들었지. 지금은 잘 모르겠구먼.”

 

 

왜 모든 연도를 마당 한 가운데로 모아 굴뚝을 낸 것일까? 주인 잃은 집은 휑하기만 하다. 언제가 다시 시간을 내어 후손들이 모인다는 명절 때 찾아보아야겠다. 궁금증을 풀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르겠지만.

속초에서 7번 국도를 이용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우측에 왕곡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고성군 죽왕면 송지호 뒤편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지금의 오봉1리의 옛날 명칭이다. 14세기경 강릉함씨, 강릉최씨가 용궁김씨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이 처음 생겨난 것은, 고려 말 함부열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후, 150여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왕곡리에는 함씨, 최씨, 진씨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살고 있다. 현대문화의 범람에도 변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을 둘러보았다.

 

 

19세기에 조성된 왕곡마을

 

왕곡마을을 찾았다. 모처럼 날씨가 푹해 답사하기에는 제격이다. 왕곡마을에는 19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북방식 전총한옥 21채가 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옛 모습을 그런데도 지켜오는 밀집된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을 둘러쌓고 있는 5개의 봉우리로 인해, 6.25 한국동란 때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20~30평 규모로 한 건물 내에 수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기와집들이 많다. 이 집들은 모두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이다. 또한 부엌의 앞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긴 추운지방의 기온을 버틸 수 있도록 꾸며진 집들이다. 왕곡마을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있으며, 주변을 산이 둘러쳐진 병풍 안에 자리한 마을이기도 하다.

 

 

담장 위에 올린 항아리 무엇이지?

 

이렇게 왕곡마을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인접하고 있는 구성리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왕곡마을을 돌다가 보면 두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첫 째는 담장에 낸 굴뚝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굴뚝이 서 있는데, 그 굴뚝을 담장에 붙여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굴뚝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들이다. 이 마을은 집집마다 굴뚝위에 항아리를 얹어 놓았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엔 우물이 없는데 마을이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예부터 이 마을은 모두 부자가 아니어도 기와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근 구성리 마을에 기와 굽는 가마가 있어서 였다고 한다.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통 한옥마을로, 14세기 경 부터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용궁 김씨 등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왕곡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0.5지점에 있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서 취락을 이루고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강릉함씨와 강릉최씨, 용궁김씨 등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인 함부열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은거한데서 연유되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이래 150여 년 간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거주 현황은 함씨(25), 최씨(11), 진씨(4)가 주를 이루고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있다. 이 마을은 14세기경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 취락을 형성하고 19세기를 전후하여 건축된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현대 문화의 변화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연경관 주택 건축 농업위주의 생활 등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래되고 있어 전통민속마을의 가치가 인정된다.

여주에 있는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 ~ 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구리시)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능 앞에는 제례를 올리는 준비를 하는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종 14년인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재실이란 제관의 휴식을 위한 공간과 제수의 장만 및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었는데,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이 재실은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담벼락 속에 들어간 굴뚝, 최고의 걸작품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현재 효종대왕릉 정문 바로 안에 자리하고 있다. 능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자리한 재실은 주변을 모두 담장을 둘렀다.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 자리를 한 대문채는 방과 부엌, 그리고 대청 등으로 꾸며졌다. 들어가면서 좌측의 대문채는 끝에 대청과 방을 드린 날개채를 두고 있고, 그 뒤편에 다시 건물을 덧붙여 방과 헛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대문채에는 방은 있는데,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굴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대문채는 바깥 담장을 벽으로 쓰고 있는데, 이 담장에 보면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사이를 띄운 기와 몇 장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구멍은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얼핏 보면 바람이 통하게 하는 바람구멍과 같이 생겼다. 그 구멍이 있는 뒤편으로는 모두 방을 드렸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이 담장 중간에 네모나게 만든 구멍이 바로 굴뚝이다. 부엌에서 불을 떼면 방안에 고래를 돌아 온 연기가, 바로 담장 안에 있는 연도를 통해 이 구멍으로 빠지게 되어있다. 최고의 건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의 미학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담장 안에 숨은 굴뚝.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마저 숨기는 이러한 건축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돌로 쌓은 외곽 담장이 아름다운 효종대왕릉의 재실


 

 

 

외곽 담벼락에 난 이 구멍들이 바로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다. 이 담방 안에 연도가 숨어있다.

 

 

 

 

 

 

 

 

 

 

 

 

재실 외벽의 아름다움

 

현재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제관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재실과 행랑채를 겸한 대문채, 그리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등이 있다. 재실의 경내에는 우물과 천연기념물 제459호인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과 고목 등이 있다.

 

이 재실에서 제관들이 쉬는 공간은 솟을대문을 들어선 후, 정면의 일각문을 지나 서 있는 재실이다. 그런데 이 재실의 심벽은 처마 있는 곳까지 쌓아올렸다. 이런 형태의 모습은 어느 전각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다. 이 건물의 양편 외벽만을 이렇게 꾸며 놓아, 이곳의 특별함이 눈에 띤다.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건축학으로 보아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의 심벽. 처마있는 곳까지 전체를 다 꾸며서 특별한 건물임을 알려준다.

 

 

 

 

안양청의 건축미학 돋보여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아 올린 안향청.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이 안양청은 앞에서 바라보면 좌우에 방문과 같은 여닫이 창호가 있고, 중간에는 대청문과 같이 꾸며졌다. 그런데 정작 방은 우측에 문 안쪽이 방이다. 그것도 전체적으로 다 방을 꾸민 것이 아니고, 반을 나누어 앞쪽에는 방이 있고, 뒤편으로는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결국 중앙에 둔 대청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어 있는 방과 같은 창호는 우측만이 방이 된다. 더욱 이 방의 마루를 향한 창호는 특이한 문양으로 꾸며졌다. 이 창호는 '교실팔각불발기'란 방법으로 중앙을 꾸미고, 나머지는 격자살로 조형미를 돋보이게 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효종대왕릉의 재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담장 안에 둔 굴뚝과 위까지 끌어올린 심벽, 그리고 안향청의 독특한 건축방법 등. 이 재실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고택보다도 훌륭하다. 

'감찰'이란 조선조 사헌부에 속해있던 정6품의 관리를 말한다. 감찰은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정원은 24명으로 지방관의 비위를 규찰하기 위한 파견도 나갔으며, 각 관서에서 회계감사 등을 위해 사헌부의 검찰을 요청하는 청대에도 파견되었다. 감찰은 원래 고려시대 어사대의 감찰어사직을 계승한 직책이다.

 

집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그저 평범한 듯 하지만, 어느 한 곳은 딴 집과는 다른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는 집들이 있다. 감찰댁이 바로 그런 집 중 하나이다.

 



 

아산시에 있는 외암민속마을에 가면 이러한 '감찰댁'이란 택호가 붙은 집이 있다. 외암민속마을이 동씨족의 마을이기 때문에 택호를 붙일 때 평소의 직책이나, 그 집의 동족 내에서의 위치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찰댁을 찾아갔을 때는 한창 보수공사를 하느라, 한편이 부산하다. 눈이 온 뒤에 질척거리는 땅을 피해 안으로 들어가 본 감찰댁, 정리를 다 마치고 나면 나름 아름다운 고택일 것이란 생각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

 


관리들을 규찰하는 업무를 보았던 감찰댁은 의외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다.


일각문 옆에는 돌담 앞에 작은 연못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감찰이란 직책은 비록 높지 않으나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관리들의 비위를 규찰하는 직분으로 만일 이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찰을 선정할 때는 명망이 있는 자들로 선정을 했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위를 보장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감찰이 살던 집이었던 감찰댁은 한 마디로 크지는 않으나,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문도 솟을대문이 아닌 일각문이다. 일각문 우측에는 연못을 파고, 돌담을 둘렀다. 일각문이 닫혀있어 공사를 하는 곳으로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우측으로는  작은 못이 있고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래된 정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에도 연못과 정자가 서 있다. 소탈하지만 멋을 낼 줄아는 집이다.

 

일각문과 어우러진 돌담이 참으로 정겹다고 느껴지는 집이다. 외암민속마을의 대개의 집들이 이렇게 돌담으로 꾸며져서, 돌담길의 운치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한편에 누정을 올린 안채

 


감찰댁에는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안채 앞에 작은 정원 등과 주변의 숲이 잘 어울린다.


안채 한편에 자리잡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당.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있다.

 

현재 외암리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감찰댁은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진 것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너른 앞의 정원 등으로 보아 행랑채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ㄱ 자 집으로 지어졌으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작은 동산으로 조성한 정원의 뒤편에 자리한다.

 

안채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방을 서쪽으로는 마루방을 들였다. 아래쪽으로는 안방이 있고 이어서 부엌과 작은방을 꾸몄다. 집은 크지 않지만 단아한 품위를 지키고 있어, 이 집 주인의 심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안채의 한편 끝에 마련된 누마루방. 아래로는 아궁이를 내고 담벽을 까치구멍으로 둘렀다. 위로는 누마루방을 내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이 감찰댁의 안채의 특징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볼 때 오른쪽 끝에 낸 마루방이다. 아래로는 아궁이를 두어 벽을 까치구멍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낸 방을 꾸몄다. 기단을 장대석이 아닌 네모난 돌을 이용해 쌓은 것도 이 집이 주는 느낌이 검소하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당만이 남아있는 감찰댁. 그저 마음 편하게 둘러볼 수 있는 정겨운 집이다.

 

굴뚝과 우물의 여유로움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굴뚝. 네모난 곳에는 그림을 그린 도판이 있던 자리로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이 정겹다. 감찰댁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았다. 관리를 규찰하는 업무를 보는이답게 검소하게 지어진 집이다.
 
 
안채 뒤로 돌아가면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높은 굴뚝이 하나 서 있다. 이 굴뚝의 가슴 높이정도에는 사방에 네모난 공간이 보인다. 무엇을 떼어낸 듯하다. 아마 이곳에 도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 도판에 무슨 그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방에 있는 떼어낸 자국으로 보아 멋스러웠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비어진 부분을 할 빨리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뒤편으로 돌아보니 안방의 뒤편에 우물이 보인다. 막돌로 쌓은 우물은 덮개가 다 부수어졌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정원과 정자 연못 등이 아우러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깨끗한 집이다. 집 주인은 감찰이란 직책에 알맞게 살아온 듯하다. 집은 비록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주변에 대밭과 정원 등과 어우러지는 외암민속마을 감찰댁. 이런 여유로움에 파묻혀 지내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

집안 여기저기 장작이 쌓여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보인다. 아직도 과거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가 있는 초가집. 초가집이 '고래 등 같다'고 하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주로 기와집이 덩그렇게 높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은 초가집이면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정원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진다. 넓은 사랑채가 높이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로 만든 작고 소담한 담장에 붙은 일각문이 대문 역할을 하는 정원태 가옥의 안채 역시 초가로 운치 있는 집이다.

 

 

명당에 자리한 초가

 

제천 정원태 가옥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가옥은 전망이 좋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초가집은 전형적인 길지로 알려져 있다.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 ㄴ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튼 ㅁ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날개 부분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 서쪽이 트여져 있다.

 

안채는 작은 부엌과 안방, 윗방, 2칸 대청이 있고, 그 끝에 골방을 - 자 형으로 배치를 했다.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어, 이 건넌방이 집안 살림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현재는 노부부가 집을 관리를 하고 있으며, 이 부부 역시 부엌에 달린 이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은 시원한 2칸 대청이 있고, 한편에는 부엌방과 큰 사랑이 반대편에는 작은 사랑방을 드렸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 부엌이 딸린 방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들을 보호한 사랑채

 

정원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사랑채다. 그 규모는 안채보다도 충실하게 지어졌다. ㄴ자 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부엌을 동쪽에 두고 부엌과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꾸몄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시원하게 꾸며졌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돌출된 방이 있고, 그 방 뒤로 부엌을 달았다. 안채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랑채의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한 것이다.

 

행랑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부녀자들이 사랑채를 찾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앞이 트여있어 전망이 좋다. 큰 사랑은 앞쪽과 대청 쪽에 문을 달아 바람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은 사랑방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ㄴ 자로 지은 사랑채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편쪽의 꺾인 부분을 짧게 처리를 하였다. 서쪽이 트여있어 안채의 답답한 점이 없게 꾸몄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꾸며 좌측부터 작은 부엌 사랑방, 대청, 골방을 - 자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드렸다.

 

사랑채의 앞쪽은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내달아 부엌방이 돌출된 곳까지 연결을 하였다. 사랑채는 원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 뒤 스레드로 지붕을 올렸다가, 현재는 초가로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 서쪽 끝에 꺾어진 곳은 광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면은 -자로 되어있으며, 뒤편으로 돌아가면 ㄴ자형으로 지어졌다.

 

안채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정원태 가옥의 안채는 꺾어진 부분에 2칸 대청이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앞쪽은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툇마루는 끝 작은 부엌의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방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내어 그곳으로 출입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이용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한다.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방안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달았다. 다락의 밑에는 작은 부엌을 꾸몄다.

 

툇마루 끝에 달린 다락의 밑은 작은 부엌이다. 문이 달리지 않은 아궁이를 둔 이 작은 부엌은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가 있지만, 휑한 곳에서 바람을 맞지 않도록 꾸며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늑함을 준다. 정원태 가옥을 둘러보면 부녀자들이 살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동쪽 밖의 담장과 안채의 사이에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집을 지을 때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투박한 굴뚝이 정감이 간다. 마치 거대한 함포와 같은 모습이다.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도 이 집을 아름답게 보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함포와 같은 굴뚝,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정원태 가옥을 들러보다가 뒤뜰로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굴뚝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곳에 함포가 서 있기 때문이다. 황토로 옹기처럼 만들고 그 위에 굴뚝을 세웠다. 그리고 굴뚝을 모두 백회로 발라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함포처럼 보인다. 이렇게 투박한 굴뚝들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그 굴뚝과 초가와의 조화 때문인 듯하다.

 

이 집은 배수가 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물이 차는 법은 없겠지만, 돌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집안에 드는 물을 빠르게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뒤에도 돌로 꾸민 배수로가 있다. 이렇게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가 이 집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정원태 가옥의 문은 크지 않다. 담장에 일각문으로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의 대문이 멋스럽다.

 

 이 집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 곁에 놓인 디딜방아도 정원태 가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정원태 가옥의 대문은 일각문이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훤히 트여있어, 대문으로 인한 무거움을 굳이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담 장 사이에 붙어있는 일각문도 초가를 얹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채의 곁에 놓인 디딜방아 공이가 여유를 보이는 것도, 이 가옥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초가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원태 가옥. 일생에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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