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에는 탑동마을이 있다. 탑이 있어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익산 황등에 일이 있어 들렸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탑동마을을 찾아갔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층석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백제탑을 많이 닮은 이 탑은, 백제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백제 때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탑은 대웅전의 앞에 서 있던 탑이라는 것이다. 이 탑에는 근처에 있는 건장산 약수와 함께 전설이 전하고 있다. 탑을 보러갔다가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는, 괜히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글을 쓸 때마다 현장답사를 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한 가지 기사거리가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남녀의 시합이 병을 불러

 

이 탑동 삼층석탑을 쌓은 것은 이 마을에 살던 여자장사라는 것이다. 이 탑골에는 여자장사가 살고, 마을 뒤편 장자골 마을에는 남자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가끔 이런저런 시합을 하였는데, 두 사람이 탑을 쌓은 후 그것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어트리는 시합을 하게 되었단다. 여자장사는 지금의 탑동 삼층석탑을 세우고, 남자장사는 자신이 사는 장자골에 석탑을 쌓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시합을 하던 날 온 마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며, 두 사람의 시합으로 인해 잔치가 벌어졌다. 탑을 다 쌓고 난 후 여자장사는 남자가 쌓은 장자골의 탑을 한 번에 밀어서 넘어트렸단다. 그런데 남자장수는 여자장사가 쌓은 탑골의 탑을 무너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삼층석탑은 당시 탑골에 사는 여자장수가 쌓았다는 탑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합을 하고 난 후 여자장수의 늙은 어머니가 이유도 없이 지독한 피부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온 몸이 시커멓게 짓무르고 죽을 것 같은 피부병에 걸리자, 여자장사는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피부병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피부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죽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100일기도를 한 여자장사

 

탑골 여자장사는 어머니가 죽을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을에는 해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자장사가 무너트린 장자골 탑의 혼이 어머니에게 씌워서 그렇게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여자장사는 탑골 자신이 쌓은 석탑 앞에 꿇어앉아,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100일 동안 정성을 드렸다.

 

 

여름철에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여자장사는 꼼짝 않고 탑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100일 째가 되던 날 천둥번개가 치더니 혼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건장산 골샘약수를 먹이면 피부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여자장사는 그길로 골샘약수로 달려가 물을 떠다가 어머니에게 먹이고, 그 물로 온몸을 씻어드렸다. 그랬더니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골샘약수를 마셔보다.

 

마침 주민 한 사람이 탑이 있는 곳으로 자나간다. 약수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날은 춥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약수를 빠트릴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런 전설을 간직한 약수라면, 한모금은 먹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탑 뒤로 난 길을 따라 약수를 찾아 나섰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산길로 잡아든다. 공기가 맑다. 심호흡을 하면서 대나무 숲을 지나고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아래로 약수터가 보인다. 내려가 보니 그 추운 날인데도 약수는 얼지가 않았다. 옆에 걸린 바가지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셔보니,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이 물을 마시고나면 웬일인지 속이 깨끗해질 듯하다.

 

 

약수를 마시고 동네로 내려오니 마을에도 우물이 있다. 우물체험도 한다고 적혀있다. 골샘약수는 최근에도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보면 가끔 이런 전설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전국 어디를 가나, 우리들을 가르치는 전설 한마디쯤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전설이, 그저 전설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 안에 숨은 깊은 속내는 사라진 채.

임진왜란과 일제치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 문화재를 찬탈해간 숫자는, 아직도 어림잡아 계산을 할 뿐이다. 그 정확한 숫자가 얼마인지 그저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수보다 많을 것이라는 막역한 추측을 할 뿐이다. 2003년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해외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과 열강이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합쳐 20개국에 모두 75,226점이라는 것이다.

 

그 중 일본이 가져간 것은 34,157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조사를 할 수 있는 문화재의 숫자일 뿐, 실제로 고서화 등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문화재를 수탈해간 아픔의 흔적이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등록문화재’로 자리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일본의 우리문화재 찬탈의 흔적

 

등록문화재 제182호. ‘구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이 건물은, ‘발산리 금고’라는 명칭으로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이 되었었다. 그 후 <군산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군산은 우리에게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한수 이북과 경기, 호남, 강원도, 그리고 충청권의 많은 소중한 문화재들이, 이곳 군산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간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런 일본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야한다고 주장들을 했지만, 그것도 우리 역사의 한 일면이라는 점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였다. 아마도 이런 문화재 찬탈의 장소인 창고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요즈음 사람들이 알게된다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창피한 과거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아픈 역사를 갖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창피하다고 가리고 숨긴다면 그 아픔은 잊을 수가 있겠지만, 또 다시 그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구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데 있어, 더 없이 좋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마타니 귀중품 창고, 그 아픔을 보다.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그 우측 뒤편에는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일본으로 반출을 하기 위해 전라북도 인근에 있는 석조문화재들을 시마타니 농장으로 옮겨 와 보관을 한 것이다. 이 석조물들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학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3층의 창고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등록문화재인 시마타니 농장의 귀중품 창고이다. 이곳 금고에 보관한 귀중품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재들이었다. 일제시대 군산지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30년대에 지은 농장의 금고이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장본인이다.

 

 

이 금고형 창고는 모두 3층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1층은 반 정도가 땅 속에 묻혀있어, 반 지하로 꾸몄다. 3층의 콘크리트 건물에는 층마다 좌우편에 작은 창을 내었는데, 철장을 지르고 그 겉을 철문으로 꾸민 이중의 문이다. 이렇게 창고 하나를 금고형으로 지어 놓은 것은, 그 안에 시마타니가 수집한 우리 문화재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아픔이 있는 시마타니 금고

 

학교건물 쪽으로 난 이층에는 미국에서 수입을 했다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다. 아마 이 문을 통해 금고 안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이 철제문이 달려있는 곳은 이중으로 건물이 지어졌던 것 같다. 금고 문 위로 보면, 벽에 건물을 잇대어 지었던 흔적이 보인다. 그토록 단단하게 창고를 지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서화나 도자기 등 창고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이 금고에 보관을 하고, 부피가 큰 석조물들은 야외에 두었다니 도대체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쇠창살 안으로 1층 안을 들여다보니 꽤 넓은 공간이다. 그 한편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보인다. 이층에 낸 금고의 문은 쇠사슬로 묶어놓아 안을 볼 수가 없음이 아쉽다.

 

그러나 건물 외벽으로 난 창을 보면, 안으로는 창살을 대고 밖으로는 철제문을 달아 이중으로 보안장치를 했다. 그만큼 우리 문화재를 수탈해가면서 보호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단하게 지어진 덕분에, 한국전쟁 때도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인민군들이 옥구지역의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재가 사라져간 곳. 그 주위를 돌면서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당시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어,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든다. 더구나 이 건물이 학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더 고맙다. 적어도 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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