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소다. 소는 우리 농사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반자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이 소 한 마리가 열 사람의 몫을 감당해 낸다고 한다. 봄에 모심기를 하기 위해서나 밭을 갈 때는 소에 쟁기를 달아 밭을 갈거나 논을 갈아야 한다. 이렇게 농사일을 할 때는 그냥 소를 모는 것이 아니다. 소와 상응하는 소리를 하면서 밭갈이를 한다.

 

어여~ 으라라차농사꾼이 논을 가는 소를 몰면서 하는 소리다. 이 소리를 할 때는 흡사 소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소를 짐승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같은 동질의 동반자라는 개념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와 이야기 하듯 소몰이 소리를 하는 것이다. 양평군 양동면에 사시던 최원산옹이 소모는 소리를 불러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소는 짐승이 아녀. 소는 우리와 똑 같은 일꾼이여. 그래서 소리를 하면서도 이야기를 해야만 해. 왜냐하면 소는 사람들의 말귀를 다 알아듣거든."

 

 

하기야 그렇다. 지금처럼 기계화가 되지 않은 영농방법으로 농사를 지을 때는, 당연히 소에게 큰 의존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가 보니 소가 그저 가축이 아니라, 집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공감이 간다.

 

"사람들은 그저 소가 고기를 먹는 가축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죄 받을 사람들 생각여. 소는 우리에게 고기를 주는 것이 아녀. 생각을 해봐. 소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는 가축이 또 있는지. 평생을 논 갈고 밭 갈면서 정말 뼈가 노긋하도록 일을 해주고, 그 다음에 힘이 부족하면 인간을 위해 또 희생을 하는 거야. 이런 소와 같은 사람이 나랏일을 한다면, 우리나라가 참 좋은 나라 되지"

 

그때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살아가면서 보니, 어르신의 그 말씀이 정말 공감이 간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소와같이 우직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 말이다. 그렇게만 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쌍겨리는 두 마리의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농사법이다. 두 마리를 한데 묶어 일을 하면 그만큼 능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쌍겨리는 예부터 전해진 농사법이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속에도 쌍겨리가 나온다. 대개 외겨리는 작은 천수답이나 좁은 논에서 사용하지만, 쌍겨리는 정리가 잘된 큰 논이나 밭에서 사용한다. 소가 논밭의 끄트머리까지 가면 "우여차~ 우르르르~" 하고 소리를 내면 뒤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만큼 소를 부리는 농사꾼과 소가 마음이 상통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요즈음 세태를 보면 국민을 위하라고 표를 주어 뽑아놓은 사람들이 국민의 말을 듣지 않는다. 국민들마저 패가 갈라져 난리들을 피운다. 누군가 이게 나라냐?”고 물었단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이게 국회냐?” 혹은 패거리를 나눈 이게 국민이냐고 누군가 질문을 했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할까?

 

주인이 소를 모는 소리를 들으면서 요즘 세태가 생각난다. 쌍겨리 소는 두 마리 중 한 마리만 삐걱해도 제대로 밭을 갈 수가 없다.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보조를 맞추어야만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있다. 소를 모는 사람이 주인이다.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국민이다. 그렇다면 두 마리의 소는 누구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이 시대에 여야라는 패를 갈라 기름과 물이 되어버린 한심한 작태들을 보면 이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람이 살면서 항상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밭을 갈 때는 쌍겨리와 같이 두 마리의 소가 서로 호흡을 맞추어야만 한다. 그리고 소를 모는 사람과 같이 서로 마음이 상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라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나라의 운영도 동일하다. 함께 가야할 두 마리의 소가 제각각 움직인다면 나라라는 농사는 망치게 된다. 하기에 혼자 고집을 피우고 제멋대로 가는 빗뚫어진 소는 되지 말아야 한다. 이 시대에 정말이지 우리에게는 쌍겨리가 필요하다.

해가 저무는 12월 22일은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冬至)’이다.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집의 여기저기에다가 뿌린다. 한 마디로 모든 잡귀들이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잡귀들은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런 풍습이 전해진다. 아마 팥죽을 한 그릇 먹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몸 자체를 잡귀에게서 보호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아우한테 가니 동짓날 팥죽 쑬 것을 미리 준비를 한다고 장을 보러 나간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집에 찾아오니, 적잖이 팥죽을 끓여대야 할 것이다. TV를 보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꾼’이란 단어 생각이 난다. 어째 갑자기 ‘꾼’이란 말이 생각이 날까. 아마도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정치인들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국어사전에서 ‘꾼’이란 말을 찾아보았다.


‘꾼’은 나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

<꾼>이란 [명사]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 그래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을 ’누리꾼‘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런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즐기면서 하는 사람이란 뜻이란다. 누리꾼이란 결국 ’누리‘와 ’꾼‘의 복합어인 듯. 그 뜻이 인터넷 안에서 못 갈 곳이 없으니 ’온누리‘를 다닌다는 것인지, 아니면 즐긴다는 것을 ’누린다‘로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다. 워낙 어휘력도 부족한 내가, 국문에도 문외한이니 말이다.

기실 과거부터 많은 ‘꾼’이란 밀을 사용했다. ‘꾼’이란 자신이 즐기면서도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공유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고 늘 생각을 한다.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 즐거움을 남들과 공유를 하고, 나름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꾼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많은 꾼들은 나름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이런저런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 농사꾼 /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꾼들은 농사를 지어 나만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다. 예전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농사소리에 보면 ‘이 농사를 얼른 지어 나라님께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선영봉제 마친 후에 처자권속 배불리세’라는 사설이 있다. 즉 농사꾼이란 단순히 나만 잘 먹는 것이 아니고, 나와 이웃, 그리고 나라까지 걱정을 했다.

○ 장사꾼 / 장사를 한다는 것은 이문을 남기기 위해 한다. 하지만 그 이문을 그냥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이문을 남겨 생활에 보탬을 주지만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날라다 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 풍물꾼 / 풍장을 치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전문적인 기예를 펼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도 자신의 기예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함께 즐김이라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자신이 노력을 하여 갖게 된 예인으로서의 능력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써 함께 공유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춤꾼, 소리꾼 등 다양한 예능의 전문가 집단이 있다고 하겠다.

○ 상여꾼 / 출상을 할 때 상여를 메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전에는 영구차로 씽~ 하고 장지로 가는 것이 아니고, 꽃상여를 만들어 여러 사람이 상여를 메고 상엿소리에 발을 맞추어 장지로 향하고는 했다. 이 안에 발을 못 맞추는 짝발이라도 있으면 곤란을 당한다. 이렇게 마음을 합하여 상여를 메는 사람들을 상여꾼이라 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선소리를 하는 사람을 ‘향두꾼’이라 한다. 이 향두꾼은 한 마디로 상여꾼을 인솔하는 지도자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꾼이란 참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정말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자꾸만 날 괴롭힌다. 꾼이란 다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꾼도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도 있고 훼방꾼도 노름꾼도 있기 때문이다.

꾼에도 종류가 있어

‘사기꾼’을 찾아보니 [명사] ‘사기를 일삼는 사람. 사기사(詐欺師). 사기한(詐欺漢)’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사기란 남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훼방꾼’이란 남의 일에 훼방을 놓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좋은 꾼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노름꾼’이야 노름에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니 오죽하리오.

그러고 보면 ‘누리꾼’ 중에도 같은 이름을 갖고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남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 즐거움을 주며, 양식이 될 만한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누리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없이 남을 비방하고 폄하하면서, ‘카더라’ 식의 글을 적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쁜 누리꾼>에 속할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은 스스로가 판단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같은 이름을 가진 ‘꾼’이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정치꾼’이다. 정치꾼이란 그야말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흔히 ‘정치인’ 혹은 ‘정치가’라고 표현을 하지만, 이들이 좀 더 전문적인 집단으로 승화를 하기 위해서는 ‘인(人)’보다는 ‘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꾼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표현을 한다. 예를 들어 사전에서 농사꾼을 찾으면 ‘농사짓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표현을 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꾼’이 필요해

이 ‘정치꾼’은 사전에 ‘정치가를 낮추어 이르는 말, 정치에 관계되는 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꼭 참여하는 사람’.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정치꾼이란 ‘정치를 해서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들의 권익보호와 복지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런 전문가’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무리 보아도 이 정치꾼들이 국민을 위해 노력을 하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잘 먹고 아전인수 격인 주장만 하면서 국민들을 내동댕이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은데, 그런 내용을 속속들이 모르니 더욱 답답한 일이다.

내년에 총선이 있다. 여야가 모두 새판 짜기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등을 돌린 지가 오래이다. 이젠 지금까지의 그런 구태한 모습들을 보여서는 국민들의 눈길을 받기가 쉽지가 않다. 이제는 정말로 국민들을 위한 그런 전문적인 ‘꾼’이 필요할 때이다. ‘싸움꾼’이나 ‘난동꾼’이 아닌, 국민을 위하는 그런 듬직한 즐거움을 주는 ‘꾼’ 말이다. 동지 팥죽 생각을 하다가말고, 별 생각을 다 한다. 아마도 동지팥죽을 들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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