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볼라벤'은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에도 상처를 남겼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속초 등에서 실제로 목격한 바로는, 기왓장 등이 수시로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럴 당시 바람은 초속 10~15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태풍 블라벤의 바람은 기왓장 정도는 당연히 날아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오늘 오전 국보 67호인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기와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또 보물 396호인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일부도 파손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아무래도 사찰 등은 지붕을 기와로 올리기 때문에, 그만큼 태풍이 강한 바람을 동반하면 전각의 지붕들이 가장 심한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전라남도가 문화재청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진 문화재의 훼손은, 국보 각황전과 보물 흥국사 대웅전 정도겠지만, 태풍이 끝난 뒤 전국의 사찰 등에서는 기왓장이 훼손 등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볼라벤은 내륙으로 진입을 했다고 하지만, 문제는 14호 태풍인 덴빈이 바로 올라온다고 한다. 문화재 보존 등에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7월 15일. 이틀간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멈춘 듯하더니, 이번에는 날씨 몸을 무겁게 할 정도로 덥다. 구례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인 사성암은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도선굴에는 원효와 의상, 도선과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대가 있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셔틀버스로 운행하는 사성암 가는 길


현재 사성암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인 몇 채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전각 안에는,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음각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초반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애상이 보호하는 이 적각 앞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구비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네 분의 고승이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로 오르다가 보면, 800년이 지났다는 고목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괴목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소원바위. 그 앞에는 명패를 적은 나무들을 가득 걸어놓았다.

 

 


지금은 밑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사람들을 사성암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왕복요금은 3,400원이며, 언제라도 사람들이 차면 출발을 한다. 예전에 이곳을 걸어 올랐을 때 3시간이 넘었던 기억을 하면, 이제는 답사도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굴을 지나면 절경이 펼쳐져


산왕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도선굴로 들어선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한 것이 습기가 가득하다. 예전 고승들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참선을 한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곳에서 더욱 더 인간의 힘든 것을 이겨내며 스스로 달굼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굴을 나오면 절벽에 붙들어 매듯 만들어 놓은 나무로 짠 길이 나온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붉은 섬진강만 보일 뿐, 흐린 날이라 그 앞 절경이 감춰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돌아내려오는 길에 보니 젊은 사람들이 괴목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저 나무처럼 그리 오랜 세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늘 다녀보지만 좋은 절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가는 것이지만.


사성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 장 촬영을 하려고 하니 문화재라서 사진을 찍으면 인된다고 한다. 요즈음 답사하기가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사진촬영금지 때문이다. 그래도 허락을 받고나서 대개는 촬영을 하지만, 어떤 곳은 아예 딱 잘라 거부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씁쓰레하다. 사진촬영을 막는다고 문화재보호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말이다.

 

 


 

참 그동안 세상을 헛살았다는 반성을 해본다. 바람이 찬 방에서 괜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그동안 세상을 살아 온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만든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하는 대답이 맞을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을, 한 번도 내가 정말로 불효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매번 효가 어쩌고저쩌고 입만 벌리면 떠들어 대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얼마나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효를 깨우쳐주는 구례 화엄사 효대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 몇 번이고 찾아갔으면서도 반성을 하지못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를 하다니


날이 춥다. 이 추운 날에 괜히 날이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생각이다. 그 추운 날 부모님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보아서 늘 감싸주셨다. 그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주변에 지인들이 요즈음 왜 그런 말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었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가 보니, 그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든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오셨던 분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닥쳐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참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 하라는 것은 마다하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일만을 고집스레 해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였다고 하지만, 좋은 직장을 말 한마디 없이 그만두고 나와 방황을 한 것이 30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부모님은...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그토록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통곡을 한들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 통곡을 들어줄 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분들도 안계시니. 참 바보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렇게 때는 늦어버렸다는 것에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다.


음력으로 내일이면 한 해가 저문다. 늘 음력의 생활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2월 3일 설날이 오기 전인 내일이라도 아버님 묘역을 찾아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지난 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못이라도 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가지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생각이 아니다. 그저 몇 날이 남았거나 이제는 달리 살고 싶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로 인해 작은 상처라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잘못을 빌고 싶다. 올 한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다물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님께조차 불효를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허허로운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면 될 것을.


전남 구례에 유명한 집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운조루일 것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사랑채에 붙어 있던 현판이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운조루란 명칭으로 부른다. 이 운조루를 다녀 온 것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나가는 도로 좌측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며 토지면 오미리에 해당한다.

고택 기행을 하면서 많은 집들을 찾아다녔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물론 일인당 1,000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 집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일 테고.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계시는 운조루는, 한 때는 우리나라의 최고 명당에 자리한 집으로 유명했다. 남한 3대 길지 중 한곳이라는 운조루. 금환낙지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조선조 영조 52년인 1776년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집이다.



T 자로 구성된 사랑채(위)와 대문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집

운조루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처음 질 때와는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칸이나 되는 문간채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둔 운조루는 좌우로 - 자형으로 길게 대문채와 행랑채가 자리를 한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T자형으로 마련한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이 큰사랑이고, 우측이 작은사랑이 된다.

운조루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집이란 생각이다. 이집을 둘러보면 참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 작은 사랑에서 중문을 들어서려면 길이 비탈이 져있다. 혹여 그런 비탈에 사람이라도 다칠까봐, 널빤지를 이용해 비탈을 바로 잡았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통이 있다. 통 밑에는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기관을 장치했는데, 이 나무독이 바로 그 유명한 ‘타인능해’이다.



큰사랑의 툇마루와 괴임돌. 작은 사랑에 비탈길을 바로잡는 널판(가운데)와 없는 사람들을 구호하는 쌀독인 타인능해

타인능해는 쌀 두가마가 들어간다고 한다. 이곳에 쌀을 넣어놓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이 와서 쌀을 가져가도록 만든 것이다. 나눔의 미학을 이루는 곳 운조루. 민도리집으로 지은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이 연이어져 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의 솟을대문 위에는 호랑이 뼈를 걸어놓았다. 아마 집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집안에서 태어나는 남자들이 호랑이와 같은 용맹을 떨치기를 바라서 였거나. 큰사랑채는 앞에 놓인 툇마루가 이집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듯, 나무마루를 두텁게 놓고, 마루를 받치고 있는 고임돌도 각이 진 것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끝에는 개방을 한 누정을 만들어 멋을 더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위) 와 안채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ㄷ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광이 있고, 방과 대청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 쪽은 이층으로 꾸며놓아 멋을 더했다. 수많은 한옥을 찾아다녔지만, 운조루 만큼 멋을 보이는 집은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다락방의 형태로 꾸며진 부엌의 위에도, 난간을 둘러놓아 밋밋함을 피해 멋을 부렸다.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운조루의 건축기법이 색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에 집을 지었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명당도 퇴색이 되는 것일까? 집안의 내력을 들어보면 아픔이 있는 집이다. 큰사랑 뒤편에 있었다는 별당은 사라지고, 이제는 연세가 많은 노마님이 집을 지키고 있다.


광채와 부엌을 모두 이층으로 꾸며 놓았다. 운조루에서 볼 수 있는 멋이다.

한때는 사랑 누정에서 긴 장죽을 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이 운조루의 주인은, 이야기로만 남아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갈 것이니, 아직도 운조루의 명성은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고려 경종 4년인 979년에 조형되었으니, 벌써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경내에 세워진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 임진왜란 때 몸돌인 비는 파손되고 현재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인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사라진 비의 몸돌에는 현각선사의 일대기를 적었는데,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짓고, 장신원이 글을 썼다고 한다. 비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로 파손이 되고, 그 뒤에는 구한말에 의병항쟁 때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더 손상이 된 것을, 1970년에 떨어진 조각들을 모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지켜 낸 비가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두 번이나 화를 당한 셈이다.


커다란 몸통의 현각선사 비

우선 현각선사탑비의 받침인 귀부를 보면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인 귀부보다 상당히 크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앞면과 뒷면에 각 네 마리씩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용은 구름 속에서 화염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것과, 바깥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다.

거북의 몸통은 귀갑문을 등에 새긴 거북이의 형상이다 네 발은 사방으로 뻗쳐 납작하게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방울이 부리부리하다. 눈썹은 길게 위로 뻗쳐 있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목 뒤편까지 뻗어져 끝이 모여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콧구멍은 금방이라도 강한 바람을 뿜어 낼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의 열굴은 크고 웅장하다. 콧구멍은 바람이라도 나올 듯.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에 의해 판손이 된 것을 붙인 자국이 보인다.

이수에 조각한 여덟 마리의 용,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서로가 여의주를 탐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의 용들은, 서로가 얽혀있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발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금류의 발을 닮았다. 밖으로 돌출이 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으나, 뿔이 없어 조금은 해괴한 모습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용들을 표현한 이수는 흔하지가 않다.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몸통 위에 연결부분에는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빗물이 고이면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한 편에 배수구를 내 놓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조각을 한 현각선사탑비의 비가 몸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이 더한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밖을 바라보는 용들은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이다. 용의 발은 맹금류의 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국보 2점과 함께 연곡사의 보물 중 하나인 현각선사의 탑비. 고려 초기에 형성이 된 이 거대한 조각품이 이렇게 몸돌을 잃은 체 서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우리 문화재의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해본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문화재가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게 모르게 문화재의 훼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도대체 반성이라고는 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란 생각이다.


 이질감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거기다가 행정당국에 의해서 나 몰라라 식의 훼파까지 이어진다. 언제까지 말로만 떠드는 문화재보호에 문화국가임을 주절거릴 것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