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하나가 다락 밑에 숨어 있다. 꼭 그렇게 조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집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락 밑에 굴뚝을 숨겨 놓았을까?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24-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5호인 윤승구 가옥. 이 일대는 해평 윤씨 일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 일대 가옥 중 윤승구 가옥은 상류층 가옥중의 하나로 ‘종가댁’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작은 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중요민속문화재 제196호)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윤일선 가옥(도 지정 민속문화재 제12호)이 있으며, 이 가옥과 인접해서 윤승구 가옥이 있다. 위에도 충남 도지정 민속문화재 제13호인 윤제형 가옥이 자리하고 있어 집단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 헌종 10년에 지어진 ‘종가 댁’

윤승구 가옥은 상량문에 '승정 기원후 4갑진 12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조 헌종 10년인 1844년에 지어진 집이다. 윤승구 가옥의 특징은 대체로 잘 손질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쌓고, 네모기둥을 사용했으나 기둥 위에 공포를 모두 생략해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집의 담장을 모두 붉은 벽돌로 쌓아올려 고풍스런 느낌을 주고 있다.

윤승구 가옥의 사랑채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그 옆으로는 중문이 달린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문간채가 달려 있다. 중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서려면, 안채가 마주 보이지 않도록 문간채의 끝에 맞추어 바람벽을 쌓았다.


윤승구 가옥의 사랑채(위)와 안채. 종가집인데도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딴 집에 비해 소박하게 지어졌다.

안채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ㄱ자형 평면이다. 안채의 중앙부분에는 두 칸통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한 칸의 건넌방을 두고, 왼쪽으로는 두 칸의 안방을 들였다. 집의 전체적인 꾸밈에 비해 안채는 간소한 편이다. 종가 댁이라고 하면서도 결코 자랑삼지 않는 겸손이 배어있는 집 구조이다. 안방 앞으로는 한 칸의 부엌을 들였으며, 안채의 왼쪽 담장 너머에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별채를 마련하였다.

낮은 굴뚝과 숨은 굴뚝에 사연이 있다

윤승구 가옥을 돌아보면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굴뚝은 낮다. 윤승구 가옥을 답사하면서 마을 어르신 한 분을 뵈었다. 왜 이렇게 딴 집에 비해 굴뚝을 낮게 했느냐고 말씀을 드렸다.

“이렇게 굴뚝을 낮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낮추라는 교훈이여. 낮은 굴뚝이라고 해도 굴뚝의 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종가 집은 그래도 가문의 어른 역할을 하는 것인데, 종가 사람들이 먼저 낮아지지 않으면 가문을 욕을 먹어. 그저 낮은 듯 살고, 나서지 말라고 이렇게 굴뚝을 낮게 한 것이여. 우리 조상님들의 덕목이지”


낮은 굴뚝과 숨은 굴뚝의 의미는 종가집 사람으로 덕목을 가꾸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 굴뚝을 보면서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니, 선조들의 지혜에 감복을 할 뿐이다. 안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돌출된 다락 아래 숨어 있는 굴뚝이 보인다. 그저 높아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그런 마음이 생길 때마다 굴뚝을 닮으라는 것이다.

종가 집으로의 품위를 지키는 윤승구 가옥

종가 집임에도 불구하고 윤승구 가옥은 딴 집보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종가 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밖으로 향한 사랑채의 끝은 마루방으로 꾸몄는데, 창호를 색다르게 내었다. 집안의 방들은 모두 이중 창호로 하였으며, 안에는 범살창으로 하고 밖으로는 판자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대문채와(위) 중문 안의 바람벽, 그리고 별채로 출입하는 일각문(아래)

사랑채 곁에 난 중문을 들어서면 바람벽을 막아 놓았다. 이 바람벽도 담장 위에 기와를 얹어 멋을 더했으며, 좌측으로는 헛간을 우측으로는 방을 들였다. 사랑채를 보고 우측으로도 붉은 담장을 치고 일각문을 냈는데, 일각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담으로 사이를 막아 놓았다. 집 뒤로 돌아가니 대밭이 보인다. 이렇게 대를 심어 놓은 것도 늘 대처럼 뜻을 굽히지 말고, 곧게 살라는 뜻으로 가꾼 것이라고 한다. 그냥 집이 아니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 교훈을 담고 있는 집이다.

요즈음 조금 가졌다, 남들보다 더 배웠다라고 하면 그저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오르려고만 하는 사람들. 윤승구 가옥은 이런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집이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4대강 정비. 밀어붙이기식으로 진행이 되는 4대강 정비는, 연일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막대한 예산을 집행한다고 한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가운데 4대강의 정비로 인한 문화유적지의 훼손이 가장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유역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고달사지 정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주 해목산 기슭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고려 초기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가운데 하나로 왕실 비호를 받는 대가람이었다. 광종 1년인 950년 원감국사가 중건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년(원종 1)에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고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나, 그 후 기록이 없어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 고달사지 발굴 위에서 내려다본 고달사지 발굴현장. 7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6차발굴까지 이루어졌다.

  
▲ 정비된 고달사지 2009년 10월 18일 찾은 고달사지. 이렇게 정비를 하는데 꼭 10년이 걸렸다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 비의 명문에 의하면 당시에는 <고달원> 또는 <고달선원>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고달사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조 중기까지도 고달사가 번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보물 제282호 쌍사자석등 및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몸체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처음으로 고달사를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되던 2004년 8월 12일이었다.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드러난 석물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물은 보호철책을 둘렀고, 발굴 작업을 한 곳이 비에 훼손이 될 것을 우려해 천막으로 덮어놓았다.

 

  
▲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8호 석불좌. 주변은 다 파헤쳐지고 보호철책이 둘러쳐 있다

  
▲ 정비된 고달사지석불좌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 석불좌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탐방로를 만들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

  
▲ 고달사지석불좌 고달사지 석불좌가 있던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다. 주추돌이 남아있고 오르던 계단이 복원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4대강 유역 지표조사를 마치겠다고?

 

고달사지는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처음 발굴을 시작한 것이 2000년이었으니 고달사지 한 곳을 발굴, 정리하는데 6차 작업을 마친 2006년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4대강 정비라는 명목 하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날림으로 조사될 확률이 높다. 강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사람들은 물이 많은 강 주변을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형성한다. 하기에 4대강 정비를 하기 전에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돼 있는 문화재 보호절차 등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4대강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도 유적지일 가능성이 큰 지역이기 때문에, 먼저 지표조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 우너종대사혜진탑비 및 이수. 탑비의 몸통부분(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2009년 10월 18일에 찾은 고달사지는 보호철책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여 누구나 다가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헸다

2009년 10월 18일, 다시 찾은 고달사지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있었다. 보호철책으로 둘러  쌓았던 보물들은 철책 대신 주변 정리가 되어 있었고, 탐방로가 마련되어 있어 문화재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이렇게 정비를 마칠 때까지는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지표조사를 마치겠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회마을에 보를 설치하겠다고 발표를 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취소를 하는 등 개발계획을 남발하는 관계당국이다. 이런 관계당국이 올바른 지표조사를 하리라고 믿음이 가질 않는다. 4대강 유역의 문화재지표조사는 한 두 해에 마쳐질 것이 아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아야 한다. 여주 고달사지 발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5)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