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도 군관으로 살았다는 해미읍성
벌써 해미읍성을 다녀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답사를 하면 그때그때 바로 기사를 올려야하지만 현장 취재에 늘 뒷전으로 밀려버리고는 한다. 해미읍성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다녀온 곳이다. 대전에 있을 때부터 이곳은 자주 찾았던 곳이라 어느 성보다도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에 소재하는 사적 제116호이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그 중 북문은 암문으로 조성하였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했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인 1417년부터 세종3년인 1421년 사이에 5년간의 세월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으로 옮기려고 쌓은 성이다. 효종3년인 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이 성은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성을 두 바퀴 돌아
해미읍성을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 시간 안에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할 판이다. 1.8km의 성을 돌아보는 데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의 이모저모를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하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남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 위 문루로 오른다. 북쪽으로 곧게 난 길 끝에 아문과 동헌, 내아, 객사 등이 보인다.
아문으로 행하던 중 만난 회화나무와 옥사 등을 둘러보고 난 뒤, 발걸음을 재촉해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등을 일일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서문 밖으로 나와 순교지를 돌아본 후 바로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잘 정리가 된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핀다.
북암문 쪽으로 난 성벽은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복원을 한 해자 위에 나무다리가 걸려있다. 북암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성문 주위를 견고하게 쌓았다. 복원을 한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른들도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성을 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있었다.
북암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져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동문 역시 굳게 닫혀있다. 남문과 서문만 개방을 한 것이다.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안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성 밖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문이 닫혀 있으면 이럴 때는 조금 난감하다.
답사를 하는 날은 기온이 꽤 높았다. 날씨가 쾌청해 성을 촬영하기에도 제격이다. 동문 문루 양편에 꽂아 놓은 깃발들이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동문을 보고 난 뒤 다시 성을 거슬러 돌아본다. 혹시 지나친 곳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서문을 지나니 두 곳의 치성이 있다. 왜 이곳에만 이렇게 치성을 쌓은 것일까?
선조 11년인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이 해미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이 성으로 옮겨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인 해미읍성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 동안 내포지방 12개 군현을 군권을 지휘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의 순교지로 더 알려진 해미읍성. 잘 복원된 성을 돌아보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하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남문 앞에 거리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 가을 풍광에 젖어보아야겠다.
교황의 방문지를 따라 해미읍성을 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시 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박 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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