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에 소재한 학인당. 현재 전북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곳을 일컬어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인당이 있다'고 할 만큼 격식을 갖춰 지은 집이다. 한옥마을에 있는 많은 한옥을 대표하는 학인당은 100년이 지난 대형 한옥으로 건축 당시에는 2000평의 대지에, 건평만 99칸의 집으로 지은 집이다.

 

학인당은 조선조 말 왕조가 퇴락하자 반가의 상류층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이어받은 도편수와 목공 등을 청해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인당은 당시 궁중건축양식을 민간의 가옥에 도입한,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으로 그 가치가 높다.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에서 구입한 우리 목재를 이용하여 28개월 끝에 완공을 했다는 학인당. 당시 돈으로 백미 4000(8000가마)을 들여 지었다는 학인당의 규모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백낙중은 효자로 소문이 나 고종황제는 특별히 그의 효행을 높이 사 '승훈랑'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백낙중은 이 집을 장남 백남혁이 태어남을 기념하여 1905년에 부친 백진수에게서 물려받은 대지에 지은 것이다. '학인당'이란 명칭은 백낙중이 서거 후 그의 호인 '인재(忍齎)'에서 ''자를 따서 지은 명칭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안채와 행랑채를 매각. 했다. 1970년대에는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몇 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백남혁 부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썼다고 한다.

 

 

전북 예술의 산실 학인당

 

부친 백낙중의 서거 후에 일본에서 돌아 온 백남혁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력으로 전북 예술인들의 후원에 힘을 쏟는다. 심농 조기석, 유당 김희순 등의 서예가와 청천 이상범, 금추 이남호 등을 후원했으며, 소리꾼인 남전 허남옥을 비롯하여 만정 김소희,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등의 명창들을 지원했다. 학인당은 일제치하에서 전북 예술을 지켜가는 문화교류의 장이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절. 예술인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 끈질긴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학인당과 같은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학인당은 해방 후에는 영빈관으로 사용이 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전주를 방문하면 학인당에서 묵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학인당은 전북 모든 분야에서 구심점이 되었다.

 

 

변화된 모습의 학인당

 

학인당의 솟을 대문에는 '영릉 참봉 수원 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는 최근 전통찻집 '선다원'이 문을 열었다. 학인당에서 차 한 잔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가 있다. 학인당을 찾았다. 대문이 걸려있는데 집 앞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전화를 걸었더니 쪽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 놓은 정원이 있고, 뒤편 학인당의 대청에는 주인과 객들이 차를 마주하고 담소를 하고 있다.

 

신문시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안주인인 듯한 분이 손수 나와 반기며 학인당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200년간이나 이 집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정원에는 계단을 내어 깊은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지하샘이라고 하는 이곳은 원래 식수로 사용한 것이었는데,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단다. 계단 입구가 용꼬리가 되고 지하샘 위쪽이 용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의 설명만으로도 이 집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학인당 앞에서 대문채를 보니 양편에 방을 드렸다. 대문을 팔작지붕으로 꾸민 것도 특이하다. 그 한편으로 건물 한 동이 있고, 학인당의 뒤편과 좌측에도 한 동이 있다. 학인당이라는 현판을 건 본채는 팔작집으로 지붕 처리가 남다르다. 지붕의 팔자로 갈라진 아랫부분에는 문을 내고, 끝부분의 둘레를 동판으로 싸 비바람을 막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꾸며진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안채와 행랑채 등 예전의 99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저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보니 100여 년 전 상류층 사회의 집 구조가 옛 고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울 북촌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과 비길 만 하다는 학인당.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통문화 체험을 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것 같다.

 

 

수령 250~38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들 자리해

 

한때 인기리에 방영된 KBS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촬영했던 전주향교는 어떤 곳일까? 이미 전주향교에서는 영화 김혜수, 송광호 주연의 야구단>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주향교가 이렇게 영화나 드라마 등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그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경내에는 수령 250~380년의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들이 몇 그루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제379호인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하며,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전주향교의 건물 배치를 보면 중층누각으로 되어 있는 만화루를 지나면 일월문이 있다.

 

그리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 서무가 있고, 대성전 뒷담을 사이로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의 서쪽으로는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교직사 등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주향교가 특히 유명한 것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이 드는 고목인 은행나무들이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꼭 방문하는 전주향교

 

우리는 흔히 <교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전주시 교동에 자리한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말로는 원 위치는 경기전 북편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을 세웠는데, 향교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태종 1년인 1410년에 현재의 중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합심하여 선조 36년인 1603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는 가을이 되면 꼭 전주향교를 찾아가 본다. 남들은 전주향교가 사적이고 또한 어느 땐가 김혜수, 송광호라는 배우가 주연을 한 'YMCA야구단'이라는 영화를 찍은 곳으로 더 유명한 곳이라서 찾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전주향교를 찾는 것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 때문이다.

 

전주향교 안에는 5그루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수령 250~400년의 나무들은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나름대로의 자태를 자랑한다. 향교 입구에 세운 만세루를 들어서면 우측에 한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그리고 일월문을 들어가면 대성전을 마주하고 좌, 우에 한 그루씩 은행나무가 서 있다. 좌측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이상이 되었는데 온통 외과수술 자욱으로 그 연륜을 보여준다. 난 가을에 이 은행나무가 보여주는 위용에 늘 압도당하고는 한다.

 

 

물론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은행나무가 있다. 그 중에는 은행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 있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은행나무는 역시 수령 1천년을 훌쩍 넘긴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다. 그러나 몇 그루의 나무들이 모여있는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들은 또 다른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대성전 안으로 들어서면 대성전을 바라보고 우측에 또 한 그루가 있으며 대성전 좌측 쪽문을 들어서면 명륜당 앞쪽에 또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모두 다섯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저마다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전주향교. 물론 그 중에 두 그루인가는 열매를 달지 않는다.

 

 

은행의 열매가 흐드러지게 달려있는 모습도 좋지만, 노란 은행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가을을 만끽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도 하지만 무엇이 대수랴, 진정한 가을이 그곳에 있는데. 몇 그루의 보호수들이 모여 가을을 알려주는 전주향교. 나는 그래서 가을이 되면 전주향교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 가을 온통 노랗게 변한 전주향교를 찾아가보자. 진정한 가을이 그곳에 있다.

 

19회 여성주간기념식이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교동)에 소재한 수원시가족여성회관 별관 3층 대강당에서 3일 오후 3시부터 열렸다. 이 자리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김찬영 팔달구청장, 김지완 권선구청장과 안헤영 경기도의회 의원, 수원시 의회 의원 등 300여명이 참석을 하였다.

 

이날 기념식은 내빈소개에 이어 개식 선언과 국민의례, 수원시 여성상을 수상한 4명에 대한 염태영 수원시장의 시상으로 이어졌다. 이날 수원시 여성상을 수상한 여성으로는 양성평등 및 여성의 권익증진 부문에 황의숙씨,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부문에 윤숙자씨, 여성 복지증진 및 봉사 부문에는 강안미씨, 지역사회 발전 등 여성경연인 부분에는 이화자씨 등이 수상을 했다.

 

 

기예경진대회 입상자들도 시상해

 

이어 수원시 기예경진대회 수상자들에 대한 시상도 이어졌다. 기예경진대회는 시, 수필, 이주여성 백일장, 서예, 사군자, 꽃꽂이, 회화, 캘리그래피, POP 예쁜글씨, 케이크 데코레이션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으며, 시 수필 부문에는 박유미씨가 최우수상을, 이주여성백일장에는 노구치미노리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서예, 사군자 부문에서는 윤병일씨가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꽃꽂이 부문에서는 백미희씨가, 회화 부분에서는 임미영씨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또한 캘리그래피 부문에서는 노혜정씨가, POP예쁜글씨 경진대회에서는 김미원씨가, 그리고 케이크 데코레이션 부문에서는 정광옥씨가 각각 최우수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한 한 단체의 회원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수원도 다양한 여성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써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수원에는 여성들의 단체가 18개 단체가 있으며, 각 단체에 속한 회원들만 해도 많게는 1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단체도 있어, 모두 3197명의 여성들이 단체에 속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하기도.

 

공직과 각종 위원회의 여성 참여확대 할 터

 

수상을 마치고 인사말에 나선 염태영 수원시장은

민족시인 이육사의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시가 문득 생각이 난다. 올해 열아홉 번 째 여성주간 기념식을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며, 여성의 권익향상과 양성평등 사회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신 많은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많은 도의원 시의원님들과 정진숙 여성단체 협의회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면서

 

 

지금은 여성이 잠재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미래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수원은 그러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수원시 여성문화공간 휴()를 개관하였으며, 경력단절 여성 One-stop 종합취업 지원을 운영해 그동안 671명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이어서 꿈을 가진 여성이 더 큰 꿈을 꿀 수 있고,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사회, 수원의 모든 여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수원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기념식에 참석을 한 시민 한 사람은

오늘 이렇게 여성의 날 기념주간 행사에 참석을 하고보니 정말 우리 수원은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양성 평등 의식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점차 여성들의 사회 참여확대를 위해 적극적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등을 다니다가 보면, 벽에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만날 수가 있다. 팔달사 입구를 바라보고 좌측 건물의 온 벽면에도 그림이 있다. ‘좋은 사람들이라는 마을만들기를 하는 벽화작가 김영수(, 교동)씨의 작품들이다. 스스로 벽화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어요. 대학에 가서 미술을 전공하려고 영복여자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3년간 죽어라하고 그림만 그려댔죠. 그런데 어머니가 정말 무지 반대를 하시는 거예요. 옛날에는 부모님 말씀은 법이었잖아요. 지금은 어머니도 후회를 하고 계세요. 그때 그냥 미술대학에 보낼 것을 그랬다고요.”

 

 

벽화전문가로 거듭나

 

결혼을 하고나서 잠시 그림을 접었지만,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벽화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벽화에 대해 공부를 했다.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낸 벽화공부였다.

 

저 나름대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을 많이 했어요. 나무 벽에는 어떤 물감을 써야하는지, 시멘트벽은 어떻게 해야 그림이 오래가는지. 그런 재질에 따라 사용하는 물감과 코팅제, 붓 등을 다 다르게 사용하죠. 혼자 연구를 하다가보니 사행착오도 많았어요. 길을 가다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벽화를 보면 짜증이 나기도 해서 새로 그림을 그린 적도 있고요.”

 

 

그렇게 벽화를 그리기 시작해 지금은 수원 시내 학교, 건물, 골목의 벽 등 43곳에 김영수씨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교동 일대에 벽화를 그리기 위해 아예 교동 11-31에서 거주를 할 정도이다.

 

정말 그동안 연구를 많이 했죠. 저는 그림을 그릴 때 남들을 잘 시키지 않아요. 그저 작업을 하는데 칠 정도만 남을 시키죠. 제 이름을 걸고 그리는 벽화이기 때문이죠. 그림도 남들이 1주일이 걸릴 것 같으면 저는 2일이면 끝내요. 그래야 벽화를 주문한 분도 경비절감이 되니까요.”

 

 

벽화전문가라도 말을 하는 것은 빈말이 아닌 듯하다. 골목에 벽화를 그린 곳이 있다면서 안내를 한다. 교동 미술학원이 밀집해 있는 뒷골목이다. 골목 안 벽에 무궁화 등이 그려져 있다. 만일 이 골목에 그림이 없었다고 하다면, 퍽이나 보기 흉하고 지저분한 골목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선도를 위해 그린 벽화

 

이 골목이 정말 아이들의 범죄 소굴이었어요. 담배 피우고 침 함부로 뱉고, 학생들 끌고 들어와 휴대폰을 뺐기도 하고요. 심지어는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모여서 이상한 그림들을 그려놓기도 하고요

 

그래서 마을만들기 사업을 신청해 골목에 벽화를 그렸다. 지난 해 6월에 시작해, 긴 골목 전체를 1주일 만에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범 CC카메라를 달아달라고 했으나 영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시장님께 직접 청원을 드렸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다녀간 후 6일 만에 방범 CC카메라가 달렸다. 그리고 밑에는 비상벨까지 달아놓았다.

 

이렇게 해 놓으니 아이들이 이곳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죠. 아이들 고민을 듣는다고 해서 제가 해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면 아이들 속이 좀 풀리는 듯하죠.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음료수 등을 사주기도 하고요.”

 

 

그렇게 1년 이상을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은 김영수씨를 이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아이들이 남의 돈을 빼앗지 못하도록, 꼭 돈이 필요하면 자신에게 달라고 하라고 시켰다.

 

저도 아이들을 키우잖아요. 이제는 다 컸지만요. 아이들이 본래 나쁜 애들은 없다고 봐요. 가정이 원만하지 못하고 부모님들이 매일 싸움이나 하면, 그런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나빠지는 것이죠. 아이들을 무조건 나무라기보다는 타이르고 선도를 해야죠.”

 

 

내년에도 마을만들기 사업을 신청해 골목에 마저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리고 싶던 그림을, 마음껏 커다란 벽에 그릴 수 있어 행복하다는 김영수씨. 벽화 그림 전문가인 그녀로 인해, 어둡고 침침하던 골목이 밝고 아름답게 변하가고 있다.

 

4회 이주영 개인전을 찾아가다

 

해움미술관’, 수원시 팔달구 교동 91-1 지하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넓은 전시관이 나온다. 새로 미술관을 개장해 첫 전시인 4회 이주영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010일부터 시작한 전시는 116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작가 이주영은 중앙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전시실 안에는 벽에 그림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다가 낯익은 모습들이 보인다. 한계령과 골목길들. 그 골목길들이 왠지 낯이 익다. 한계령이야 헤아릴 수도 없이 넘은 곳이다. 그런데 이 골목들이 왜 눈에 익을까? “지동 골목입니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골목이니까요.” 작가의 설명에 ~ 그랬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골목을 그리는 이주영 화백

 

이젠 작가라는 말보다는 화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세월을 보냈다. 벌써 54세라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아직도 소년과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린 햇수에 비해서 많은 개인전을 갖지는 않았다. 3회의 개인전을 수원미술관에서 가졌다.(2003, 2009, 2011) 그리고 이번에 4회째 개인전을 연 것이다.

 

단체전은 미술동인 새벽전, 환경미술전, 나눔회전, DMZ, 우리가 서야 할 이 땅에서 전, JAALA, 아시아는 지금 전, 수원민미협전, 인권미술전, 백만송이 실루전, 동인전 등 많은 단체전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민족미술협회, 나눔회, 교동창작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엔 아픔이 실려 있었다.

 

29일 오후 해움미술관을 찾았다. 작가 이주영은 수원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죠. 사실은 어릴 때 지독한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1년 정도 일어설 수가 없으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것이 그리기와 만들기 증 앉아서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없었죠. 그림에는 어릴 적부터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랬기에 지금은 자신의 화실을 갖고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86-1번지 이층에 이주영 화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림이 남다르다. 어릴 때의 아픔이 있어서인가? 그의 그림 속에는 진한 아픔이 있다. 이리저리 비뚤어진 골목길,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쓸쓸한 뒷모습. 가을이 서리서리 내린 한계령. 그가 즐겨 그리는 그림들 속에는 아픔이 실려 있었다.

 

격동의 세월을 그림으로 표현 해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림을 그립니까?”라고 물었다.

그려야 하니까요. 저에게 그림은 운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죠. 좋아하는 것들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잘 맞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물론 그림을 그리면서 아픔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80년대부터 90년 초까지 격동의 세월에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진한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0년 그림을 떠나 있었어요. 안성, 평택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그림에서 손을 땠죠. 그런데 그림이 도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수원으로 올라왔어요. 선배의 화실 한 귀퉁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가 지난해에 화실을 마련했어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을 가르치는데, 수입은 영 시원찮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바로 그림에 있다고 한다. 이주영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돈으로 따지면 엄청날 것 이라고 하며 웃는다. 시간이 지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웃는 그의 미소을 보면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깊은 아픔 속에서 스스로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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