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소재한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된 홍범식 가옥. 이 가옥은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식 가옥은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가옥으로,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 선생의 고택이다. 이 가옥은 괴산 3.1만세 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말끔하게 복원을 마친 홍범식 가옥. 일요일에 찾은 홍범식 가옥 앞에는 관광 안내소가 자리하고 있어 괴산군이 이 가옥을 남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집인데다가 역사적인 장소인 홍범식 가옥은, 괴산군의 문화를 알리는데 크게 일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웬 문이 이렇게 많아?

 

말끔하게 단장된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절로 한마디를 하게 된다. 대문서부터 시작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수도 없이 많은 일각문 때문이다. 집안을 돌아보니 10여 개가 되는 문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흡사 미로 찾기라도 하는 집인 듯하다.

 

이렇게 집안에 문이 많다보니,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꽁꽁 감추어 놓은 집안의 내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민초들의 담장은 그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인데 비해. 아무래도 반가의 집들은 이렇게 조금은 가려 놓는 것이 당시의 풍습인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좌측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은 작게 만드는 것이 통례인데, 홍범식 가옥의 사랑채를 들어서는 일각문은 두 칸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일각문 우측에는 작은 쪽문이 나 있는데, 일각문을 열지 않고 이 쪽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다. 이런 쪽문은 대개 솟을대문에 마련하는데 비해, 이렇게 사랑채를 출입하는 문에 쪽문을 놓은 것은 특별한 건축 구성이다.

 

사랑채는 자 형으로 동북쪽의 부엌 앞에 한 칸 방을 두고 옆으로 두 칸 방, 대청, 다시한 칸 방을 나란히 배열하였다. 부엌 앞의 돌출이 된 방을 빼고는 네 칸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다섯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바라보면, 우측 끝에 작은 쪽문이 있다. 바로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비밀 문이다. 밖으로 나가 중문을 통하지 않고, 사랑채에서 이 문을 통해 안채로 출입을 할 수가 있다. 나름대로 넓은 집안의 동선을 최대한 짧게 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반가라 다르네, 도대체 광이 몇 개여?

 

홍범식 선생은 풍산 홍씨의 명문가 출신이다. 홍범식 가옥을 둘러보면, 집안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7년 전북 태인, 1909년 충남 금산군의 군수가 되었다. 1910829일 순종이 한일합방의 조약체결을 발표하자, 그날 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는 바로 홍범식 선생의 아들이다.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집안에 많은 광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우선 대문채에 광이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안채 뒤편에는 뒤주를 겸한 다섯 칸의 자형 광채가 있다. 그 맞은편에도 담장을 둘러 일각문을 들어서면 세 칸으로 마련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도 광인 듯 하다. 담장을 둘러 별도로 마련한 것을 보아서는, 특별한 것을 보관하던 곳 같다.

 

안채 부엌의 뒤로는 뒤주가 있으며,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채에도 세 칸의 광이 자리하고 있다. 집 전체를 돌아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들. 곡간으로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안에는 이러한 광들이 많아, 당시 이 집이 얼마나 많은 농토와 식솔들을 거느렸는지 가늠이 간다.

 

 

넓은 안채에 재미난 작은 것

 

사랑채를 드나드는 일각문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중문이 있다. 이 집의 중문채는 사람이 기거하는 방이 없고, 세 칸의 광이 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들여다보는 것을 막았다. 안채는 자 형으로 꾸며졌다.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세 칸씩의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대청을 벗어나 꺾어진 양편의 날개채 끝에는 각각 부엌을 두었다. 너른 대청이 시원하게 보이는 안채는 오른쪽에는 세 칸의 툇마루를, 왼쪽에는 두 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를 돌다가 보면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세 칸 대청 뒤로도 툇마루를 놓고, 안방과 윗방 뒤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이 툇마루 밑에 굴뚝과 아궁이가 숨어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굴뚝과 아궁이는 윗방에 불을 때기 위한 것 같다. 이 큰 집에서 이렇게 툇마루 밑에 숨겨놓은 굴뚝과 아궁이라니. 고택을 돌아보는 또 다른 재미는 이렇게 새로운 것을 찾을 때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한 듯한.

 

 

번듯한 대문채와 행랑채

 

홍범식 가옥의 대문채는 모두 일곱 칸으로 꾸며졌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세 칸의 광이 있고, 우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 담장을 두른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으로 꾸며진 행랑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에 안담을 두르고 마루방을 놓은 집은 보기가 힘들다.

 

행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부엌을 두고, 두 칸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이 세 칸의 방 앞에는 모두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마루방은 행랑채에 기거를 하는 남정네들의 작업 공간으로 보인다. 행랑채의 부엌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뒷문을 내었다. 이곳에서 음식이라도 해서 사랑채로 나르기 위함이었는가 보다. 넓은 집 안에서 집안 식솔들의 동선을 생각한 집이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