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 진산이라고 하는 광교산 입구에는 보리밥집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 왜 보리밥집이 모여 있는가는 알 수가 없지만, 꽤 여러 곳의 식당이 보리밥을 전문으로 팔고 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하고난 뒤 보리밥을 먹거나, 아니면 일부러 이곳의 보리밥을 먹기 위해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동안 나 역시 이곳에 있는 보리밥집을 몇 곳을 다닌 적이 있다. 집집마다 독특한 상차림으로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는 하는데, 나름대로 맛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맛이 있는 보리밥집을 만났다. 상차림이 딴 곳과는 전혀 다르다. 화학조미료 맛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집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이다.

 

 

뒷길에 숨어있는 시골농원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105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시골농원(밥상). 광교저수지에서 상광교 버스 종점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그러나 이 시골농원은 잘 찾아가야 한다. 도로변에 있지 않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찾아간다면, 쉽게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시골농원은 그냥 가정집이다. 가정집을 식당으로 꾸며 영업을 한다. 집의 중앙에 부엌을 마련하고 양편에 손님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417일 장애인 한마당 잔치를 끝내고 짜장스님과, 스님짜장 2만 그릇을 준비할 수 있는 후원금을 낸 KB금융그룹 화서동 박정운지점장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찾아간 집이다.

 

 

숨겨진 맛집, 찾고보니 행복이 밀려와

 

음식 맛이 좋은 집을 하나 찾아내면 흡사 보물이라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상차림이 단 집과는 다르다. 우선 나물의 종류가 상당하다. 그리고 보리밥 위에 쌀밥을 조금 얹어준다. 그리고 반찬도 화학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이상하게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바로 속이 뒤집어 지는 듯한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한 접시 그득하게 내어주는 야채 역시 싱싱하다. 그리고 밥을 비빌 때 사용하는 강된장과 돼지고기를 팔팔 끓여 내다 준다. 상 가득 차린 진수성찬은 아니라고 해도, 음식이 정갈하니 맛깔스럽게 보인다. 나물을 골고루 집어넣은 후, 된장과 고추장을 위에 얹었다. 참기름을 조금 치고 나서 밥을 비빈다.

 

 

인심 또한 후덕한 집

 

골고루 잘 비빔밥을 한 수저 크게 떠 입안에 넣고 음미를 한다. 맛이 기가 막히다. 한 마디로 입 안에서 술술 녹는다라는 표현이 딱일 듯하다. 야채에 싸서 한 입 먹어본다. 야채의 싱싱한 향과 함께 보리밥의 독특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데 묵무침을 한 접시 갖다가 준다. 스님이 자주 이용하는 집이라 서비스라는 것이다.

 

이 묵무침 역시 맛이 기가막히다. 야채와 양념, 그리고 묵이 어우러지는 향이 독특하다. 어떻게 이런 집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까? 이제는 외지에서 손님들이 와도 큰 걱정하지 않고 찾아갈 식당이 생긴 것이다. 가격도 1인분에 6천원이란다. 차려진 음식에 비하면 착한 기격이다. 모처럼 만난 맛집에서 기분 좋은 저녁을 먹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미식가가 되는 것일까? 정말 추천하고 싶은 보리밥집이다.

 

광교산의 생명을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일이 있다. 어떤 일을 하던지 자신이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슨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끔 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던지, 아니면 어려운 일이던지.

 

취재를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린 학생들로부터, 어른들까지. 그런 분들은 봉사를 하면서도 즐거워한다. 그것이 아주 작은 봉사일지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23() 광교산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생태계의 보고 광교산

 

광교산은 생태계의 보고(寶庫)이다. 희귀종인 수원청개구리부터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광교산을 터전으로 살아온 것일까? 요즈음 광교산은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십만의 인파가 즐겨 찾는 곳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즐겨찾기 때문에, 광교산을 터전으로 삼는 많은 동식물들이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참 이기주의적이다. 자신들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한다면,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 역시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물이나 식물 등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3월은 새 생명들이 잉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생태계의 보고인 광교산의 생명들이 위험에 처해있기도 하다.

 

 

생명을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

 

323() 광교저수지 아래 광교공원에서 세계 물의 날 기념식을 마친 후 광교산에 있는 옛 절터를 돌아보려고 산길로 향했다. 산자락 한편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가보니, 물이 고인 웅덩이에 도롱뇽 알과 개구리 알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작대기로 그런 것을 건드리면서 즐거워한다.

 

옆에 부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말리려 하지 않는다. 한 마디 하고나서 보니, 올챙이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다. 개구리알과 긴 주머니처럼 생긴 도롱뇽 알들. 저 알들이 다 부화가 된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많은 새 생명들이 또 광교산을 생명의 터전으로 삼아 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광교산 산개구리 도롱뇽 보호해주세요

개구리알 지켜주세요

 

한참이나 조밀조밀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들을 보다가 옆을 보니 이런 문구가 적힌 판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고등학생들인 듯하다. 글판에는 수원환경운동센터 청소년 하천지킴이 가람이라고 작은 글씨로 적어놓았다.

 

 

그렇게 홍보 안하면 누가 개구리 알 가져가나요?”

, 많이들 작대기로 휘젓고 그래요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촬영을 했다. 남들이 다들 친구끼리 놀러가고,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철이지만 이렇게 자연을 지키기 위해 하루 종일 서 있는 사람들. 얼마나 장하고 고마운 일인가? 이런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광교산이 생태계의 보고로 존재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생태계를 지키고 있는 환경지킴이들. 이들이 고마운 것은 물론이고,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우리 수원의 자랑인 광교산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힘들게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환경지킴이들에게 마음껏 박수를 보낸다.

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참 황당하다.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세상이 참 어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산은 무엇 하러 올라온 것인지, 그리고 왜 산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산이 좋아서 산을 다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산에 볼 것이 있다면 더욱 더 산이 좋다. 소로 길만 걷고 있어도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곳이 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는 광교산이 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이 산만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산도 흔치는 않다. 광교산은 수원의 북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며 시가지를 품에 안고 있는 수원의 주산이다. 원래 이름은 ‘광악산’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광교산은 수원팔경 중 한 곳

 

광교산은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방에 수목이 우거져 있어, 삼림욕을 하거나, 당일 코스로 오붓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예부터 광교산은 수원 8경의 하나로 불렸는데, ‘광교적설(光敎積雪)’이라 하여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경치가 8경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힌다.

 

광교산은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하루에 수십만 명이 오르내리는 산이다. 높지도 않지만 우거진 숲과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있어, 언제나 걷기에 좋은 산이기 때문이다. 광교산은 그저 이웃집 나들이를 하 듯 올라가도 좋은 산이다. 이런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한가지이기도 하다.

 

산은 그 자리에 있어 좋다

 

광교산은 자주 걷는다. 굳이 ‘오른다’는 말로 표현을 하지 않고 ‘걷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광교산을 자주 가기 때문이다. 특히 일로 인해 술이라도 많이 마신 다음날은, 일부러 광교산을 천천히 걷는다. 버스를 타고 상광교 종점까지 가서, 뒷짐을 지고 걸어 오르다 보면 무거운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이다.

광교산을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쉴 수 있는 의자들이 있다. 그 의자에 앉아 잠시 책이라도 읽노라면, 참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다. 옛날 선인들이 산이 좋아, 그곳에 정자를 지은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산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어 더욱 좋은 까닭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산을 왜  오염을 시켜

 

비가 온 다음 날 산을 오르면 더욱 좋다. 숲에서 나는 나무들과 풀의 짙은 향과, 조금은 물기를 머금고 있는 시원한 바람 때문이다. 그런 숲이 가까이 있어서 늘 머리를 식히러 걷고는 한다. 암반 위를 흐르는 계곡의 물이 더욱 더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는다.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산행을 목숨 걸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은 느껴야 더 좋다는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데 두 중년의 남여가 의자에 앉아 사랑을 확인한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저 정신없이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휴대용 카메라를 늘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뒤에서 그 모습을 담아두려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 카메라가 보기와는 달리 셔터 떨어지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셔터 소리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다본다.

 

‘선생님 지금 저희들 찍으셨나요?“

“예, 모습이 아름다워서요”

“선생님 제발 저희 사진 좀 지워주세요”

“왜요? 앞도 아니고 뒷모습인데”

“안됩니다, 제발 지워주세요.”

 

 

이쯤 되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만하다. 이 두 남녀 정상적인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인과 남편 몰래 산에 와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이 재수 없게 나에게 찍힌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절대로 지워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도 사정을 하니 어찌 할 것인가? 사진을 지워주고 나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요즈음 세상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하긴 드라마다 무엇이다 해서 보이는 것이 모두 불륜 등을 부추기고 있으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런 것으로 꽉 차 있을 것만 같다. 세상 참 돌아가는 꼴이 점점 추악해지기만 한다.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답답하기만 하다.(사진은 내용과 무관함)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은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다.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소중한 문화재

 

진각국사조탑비는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원래는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운 다음, 덮개석인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 터로 돌아가야 해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엔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고 있어 석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함부로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창성사 터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에 와서, 서 있는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의 유적발굴이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대책이 아쉬워

 

이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는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문의 글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조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에라도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곳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 그러한 소중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옮겨,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세워놓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의 또 다른 훼손이란 생각이다.

 

창성사의 발굴이 시급하듯이, 이 탑비 역시 창성사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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