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일제의 만행에 앞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들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런 고귀한 죽음을 아직도 망령된 일제의 잔재들이 더럽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가끔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젠 그도 세월이라는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순창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순창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6.25때도 불타지 않고 잘 보존된 중요 유적지며 사적지다. 순창객사는 조선조 영조 35년인 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이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순창객사와 망궐례를 행하던 정당(가운데, 아래)

서대청이 사라져 버린 순창객사

순창객사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다. 정당이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하 만만세’라고 새긴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일이 있을 때도 궁궐을 향하여 절을 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중앙의 관리가 이 고을에 찾아 왔을 때는 이곳에서 묵었던 곳이다. 객사는 공무로 일을 보는 관리들의 숙박 장소였던 곳이다.




순창객사의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안의 바닥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은 모두 살창으로 막아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는 공적인 궝례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란 생각이다.

방이 없는 동대청

원래 객사를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기 때문에 객방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런데 이곳 동대청이 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대청에 방이 있었는가 보다. 동대청은 시원하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주변에는 오래 묵은 고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객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동대청은 1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올렸다. 그리고 원형의 기둥을 세워놓았다. 대청의 누마루 위에는 가운데 기둥을 세웠으며, 천정 위에는 신서도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교한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이 객사는, 한말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구국열기가 뜨겁던 곳

순창객사는 단순히 객사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던 곳이 아니다. 순창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읍의 무성서원에 모였던 의병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잔주에서 급파된 병사들에 쌓여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결국은 숫자열세에 밀려 패퇴를 하고 말았고, 최익현은 순창객사에서 일본군에게 생포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가 되었다.



관원들의 공무길에 묵을 수 있었던 객사. 언제 서대청이 소실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정당과 동대청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자리하고 있어, 객사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 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건물 앞에 서 있는 순창객사는, 역사의 산 증거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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