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선정(臥仙亭), 신선이 누운 자리일까? 아니면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일까?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골띠말. 좁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끝 계곡가에 자리 잡은 와선정이 있다. 정자 건너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와선정이 돌담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와선정은 흡사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와선정이라고 했을까? 날이 추워서인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와선정은 사철 경계가 다 다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여름철 이 노송들과 함께 주변의 느티나무가 어우러지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글이 있다. 2004년도에 이 다리를 축조하면서 곁에 세워둔 비다. 다리에는 오현교(五賢橋)라 적혀있다. 이 정자를 지은 태백오현(太白五賢)을 상징하는 다리다. '병자호란(1636)에 벼슬도 버리고 太白山下 춘양에 은거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온 태백오현의 덕을 기리고 교유회동의 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고 오현교라 이름 짓다'라고 적혀있다.

 

다리를 건너 와선정으로 다가간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이라 칭하는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5~1654), 포옹 정양(鄭瀁, 1600~1668), 잠은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가 이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와선정이란 이름은 주변의 경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사덕암이라는 바위는 덕을 기리고, 은폭이라 하여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은색인데, 그 밑 바위가 신선이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와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며 와선정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

꾸미지 않은 간단한 현판도 태백오현의 심성을 닮았다

 

태백오현은 모두 이 와선정에서 10리~30리 거리 내에 은거를 하였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이곳 와선정에 모여 회합을 갖고, 풍류를 즐겼다.

 

와선정은 계곡 쪽만 놓아두고 돌담으로 둘렀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와선정의 출입구다. 현판은 그저 퇴락한 옛것 그대로 걸려있다. 안은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지만 누마루방이다. 아마 여름 한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 정도로 지어진 정자는 사방에 문을 내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초계천이 시원한 산바람을 몰고 들어올 수 있도록, 사방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했나보다.

 

와선정은 난간을 두르고 계곡물이 흐르는 쪽으로는 모두 뮨을 내었다.

  
방은 온돌을 놓지않고 누마루로 깔았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사방에 난 문을 열면 은폭과 사덕암, 그리고 흐르는 물과 늙은 노송, 맑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다. 태백오현은 이곳에 모여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경계에 눈을 떠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봉화는 군내에만 100여 개가 넘는 정자들이 있다. 와선정은 그 많은 정자 중 빠지지 않는다. 실록이 우거진 여름 철,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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