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만 명 이상이 민족의 대이동을 했다는 계사년 설 연휴.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설은 명절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다. 명절 때가 되면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명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절이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직업 때문에 고향을 찾아가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것은 자신이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설날인 10일 하루 동안 찾아 본 그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이다.

 

 

3년 째 보지못한 가족, 체취라도 맡고싶어

 

서울을 올라가려고 수원역을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고행을 찾아 기차를 타려고 역사 안이 시끌벅적하다. 그 한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보따리를 하나 곁에 두고 하염없이 기차를 타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눈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이 보인다. 곁에 가서 괜히 이야기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씨가 추울 거라고 하더니 좀 풀렸네요.”

담배 피우세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시죠.”

 

흡연구역으로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지를 않는다. 가만히 보니 담배가 없는 듯하다. 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고향이 어디세요?”

“......”

그런데 고향에 안 가세요?”

벌써 가족들을 보지 못한지 3년이 넘었네요.”

 

고향조차 말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부도를 내고 말았다는 김아무개() 고향을 갈 수도 없고, 전화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역에 나와 이렇게 사람들이 고향을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면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체취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란다. 그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나 역시 한 때 가족들과 떨어져 수많은 날을 그리움으로 지새보았기에,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맞는 어르신은 왜 혼자였을까?

 

명절 전인 8일 재래시장을 취재하러 나갔다. 취재를 마치고 일부러 남수문을 돌아 화성을 좀 걷고 싶었다. 창룡문 쪽을 따라 성 밑 길을 걷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 어르신 한 분이 성 밑돌에 앉아계시다. 이 추운데 왜 저곳에 계신 것일까?

 

어르신 이 추운데 왜 거기 계세요. 고뿔드시겠어요.”

갈 데가 없어

집이 없으세요?”

아니 잔 집은 있어. 그런데 장에 나온 사람들 구경하느라고

그럼 장으로 가서 보셔야죠.”

장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더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시는 어르신. 혼자 생활을 하시는 홀몸어르신이라고 하신다. 아들딸이 있지만, 벌써 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다고. 어쩌다보니 혼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어르신, 더 이상을 물을 수가 없다. 언제인가 방송 일을 할 때 양로원에 계시던 분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주소도 모른다. 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들의 이름도 모르신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무엇인가 방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쓰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손가락 글씨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귀여운 손자손녀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절이 되면 더 슬픈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명절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정부가 들어서고 최우선이 서민들의 복지라고 한다.

 

과연 이 새 정부가 온전한 복지를 이루어낼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올 계사년 추석에는 제발 이렇게 혼자서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설날 한국민속촌의 모습입니다.

속초에 가면 반드시 들려야할 곳이 한 곳이 있다. 바로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갯배 도선장과 청호동인 아바이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는, 이제는 속초의 명물이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이기도 한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12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갯배. 이 두 가지가 청호동 주민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속초시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도선인 갯배는 거룻배이다. 이 갯배는 일제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운항이 되기 시작했다. 6,25 동란 이후에 함경도의 피난민들이 이곳에 움막형태의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호동에는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자꼬치마을, 신창마을, 정평마을 등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거주하던 곳의 이름을 붙인 집단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연간 20만 명이 이용하는 갯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갯배는 1988년에 새로 FRP35인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청호동 주민들은 무료로 이용을 하고 있다. 갯배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년간 15 ~ 20만 명이 이용을 하고 있다. 이 갯배는 편도 200, 왕복 400원을 요금으로 받고 있다. 12일이 방영되고 난 후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고 한다.

 

23(). 속초 중앙시장을 들러보고 난 후 갯배에 올랐다. 승객들이 갈고리를 들고 배를 움직이게 하는 철선을 잡아당기면서 이동을 하는 갯배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갯배의 운항을 지도하는 청호동 주민의 서슬 퍼런 야단이 있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붙어 똑바로. 그리고 거기 이리 나와 배 끌어

 

 

이건 상당히 강압적이다. 처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잘 못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불과 단 몇분 안에 건너가지만, 그 사이에 연신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재미로 아바이마을을 찾아가는가 보다.

 

아바이마을의 애환 갯배

 

사실 속칭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은 우리나라 최대의 피난민촌이다. 공산치하에서 억압을 받고 살고 있던 북한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지만, 정든 고향을 잊지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정착을 한 곳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청초호 바닷가 모래톱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빠르면 보름, 길어보았자 석달이라는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벌써 60년 세월을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갯배는 실향민들의 애환이 가득 담겨있다. 일제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생긴 도선인 갯배는 당시 부월리 2(청호동)과 속진(중앙동)이 맞닿아 있던 것을, 속초항의 개발을 위해 준설하면서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이 되면서 수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속초읍에서 갯배 한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갯배를 운영할 때는 트럭 한 대와 우마차 한두 대를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어업에 주로 종사를 하던 아바이마을의 어민들이 수복 후 사용한 배는 피난 당시 타고 월남한 범선이 창이배와, 강원도와 경상도의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오마리배가 주종이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던 배는 19590년대에 들어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속초시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하였다. 1963년에 양양군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이 되는데 이들 어민들이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주된 속초의 관광수입원이 된 아바이마을과 갯배

 

드라마 가을동화로 인해 일본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바이마을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거기다가 12일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기도 하다. 12일이 이곳을 거친 후 사람들은 아바이마을을 찾기 시작했으며, 아바이마을에도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닌 점차 관광객들로 인한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 년에 20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갯배를 이용하는 요금만 해도 연간 4,000만원이라는 수입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 이곳은 점차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가, 이제는 속초시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3일에 갯배를 타고 찾아간 아바이마을. 바닷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그맣게 꾸며진 찻집에는 연인들이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골목에 들어서면 장사를 하는 분들이 손님을 불러들이느라 시끄럽다. 슬픔의 상징인 갯배와 아바마을이 이제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전주는 요즈음 시내버스가 파업 중이다. 벌써 한 달이 지난 듯하다. 시내를 나가지를 않으니 버스를 탈 일이 별로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시에서는 해결책으로 전세버스를 긴급 투입하고는 있지만, 그도 버스가 운행을 하는 때만 못하다. 예전에 20분이면 오던 버스가, 30분 이상을 기다리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날씨까지 추운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발을 동동거리며 차를 기다리다가 보면
, 괜한 성질도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성질을 참고 있는데, 옆에서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이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밉구먼.’이라니. 처음에는 버스가 자주 안다녀 불편하시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기에, 아드님이 버스 기사분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방역을 하기 위해 하루종일 마을 입구를 지키는 사람들.(휴대폰사진) 

구제역으로 자식 얼굴 보기를 포기하다

구제역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뉴스에서는 해당부서 장관이 나와 구제역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거취를 결정한다고 한다. 온 나라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에, 조속히 마무리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어안이 멍멍하다. 그렇게 조속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사람의 애를 태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야 축산업자도 아니고, 구제역에 대한 지식도 무지하다. 그저 구제역이라는 것이 네 굽을 가진 짐승들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정도만 알뿐이다. 그 구제역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가는 곳마다 방역을 하느라 난리법석을 피운다. 예전보다 참 오랜 기간 동안 구제역이 창궐을 하고, 수많은 소, 돼지들이 살아있는 대로 땅에 묻혔다. 지하수에서도 핏물이 섞인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무엇이 어찌 되어가는 것인지, 정말로 하루하루가 불안스럽기 만한 요즈음이다.

호남과 제주도만이 청정지역이라고 한다. 이번 설 연휴에 많은 사람들이 귀향을 하면서, 구제역이 이곳에도 화를 미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죽하면 명절인데도 고향을 떠나 외지에 나가있는 자손들을 향해, ‘이번 명절에는 제발 고향에 내려오지 마라. 절대로 와서는 안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까?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를 준 행동은 해외여행

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갸갸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구먼.”
그래도 소 몇 마리 살리려고 오지 말라고 했다고, 지 어미애비 속 아픈 줄도 모르고 그런 델 가야 혀

그럼 고향에도 못 오는데, 해외라도 나가면 고향에 와서 부모 못 보는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가 보지 멀 그려

암튼 철이 없어. 부모들은 가심을 조이고 있는데, 해외여행이 당키나 헌 것이여. 내 자식이지만 정말로 밉구먼
.”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이번 명절은 징검다리 명절이라고 한다. 길게는 일주일 정도를 쉬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제역으로 인해 외지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손들에게, 고향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한 모양이다. 자손들이야 그런 시간을 이용해 해외여행이라도 하겠다는 것이고. 부모님들이야 어렵게 살림살이를 하면서 집안에 식구처럼 살아 온 가축을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그런 시간을 이용해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자손들에게 마음이 아프신 것이다.

이번 연휴에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커다란 짐을 꾸려 줄을 서서, 해외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구제역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소를 짓게 만들었나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모든 일들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좋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꼭 한 가지는 부탁을 하고 싶다. 아무리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제발 이웃의 아픔을 조금만 이해를 하고 살자는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자칫 나에게도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일이다. 구제역으로 인해 고향을 가지 못해 마음이 아픈 자손들이나, 혹 불똥이라도 튈까봐 절대로 내려오면 안 된다는 어른들. 그 마음을 조금만 이해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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