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고창읍에 있는 노동저수지를 끼고 돌아 호도마을 쪽으로 100m쯤 가면, 수백 년 된 노송과 거목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숲에 정자가 보인다. 고창읍 화산리에 속하는 곳에 자리한 취석정의 ‘취석(醉石)’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연명이 한가로이 세상을 살 때 술이 취하면 집 앞 돌 위에 잠들기도 했다는 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람이 욕심 없이 한가롭게 생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취석정, 말로만 들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아, 해질녘인데도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멋을 풍기고 서 있는 취석정. 노계 김경희(1515∼1575)가 명종 1년인 1546년에 처음으로 세운 정자라고 하니, 벌써 460년을 넘긴 고정(古亭)이다. 김경희는 을사사회로 인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음 이만영, 규암 송인수, 둔옹 심광언 등 제현과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문의를 강론하였으며, 그때의 시집 노계집 1권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지석묘군과 함께 어우러진 취석정

흙담을 두른 취석정, 고창군내의 문화재에는 문을 담가놓지 않아 어디든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담장 안에는 7기의 작은 지석묘군이 자리하고 있다. 밖에도 3기의 지석묘가 자리하고 있어, 총 10기의 지석묘가 이 곳 정자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고풍스런 정자와 함께 선사유적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정자를 찾은 나그네의 홍복이 아니던가.

1871년에 중건된 취석정 한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목조 와가인 취석정은 부재가 건실한 것이 그 오랜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있다. 건물의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담장 안에 있는 지석묘 한 기에는 ‘취석정’이란 글씨를 음각해 놓았다. 담장 안팎으로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버드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덤벙주초를 놓았으며, 댓돌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했다. 주변 경관을 해하지 않고, 스스로 자연 속에 파묻힌 듯한 느낌이다. 이 정자의 특징은 정자 한 가운데 온돌방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방 모두를 분합문을 내었으며, 전 후면에는 머름대를 시설해 두 짝의 분합문을 달고 나머지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이런 구성은 밖의 경치를 시원하게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겸손함

취석정은 자연을 이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뒤로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가득한 논이다. 그 주변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는데, 밑에 웅크리고 있다. 행여 누군가의 눈에라도 뜨일까봐 걱정을 하는, 새색시 같은 마음이다. 적어도 처음 취석정을 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문을 열어 천정에 붙들어 맨 창호들이 한껏 마음을 연 듯한 모습이다. 방은 온돌로 처리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흙을 쌓아 방을 돋은 것 같아 보인다. 앞 내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에서 취석정의 세월을 읽어낸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정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정자와 지석묘가 어우러진 곳. 커다란 나무들이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가, 절대로 물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취석정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좀 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돌리는 발길 머리에 긴 그림자 하나가 끌려온다.

판소리 이론가이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1884). 오위장을 지낸 신재효는 순조 1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로 독공으로 소리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위장을 지낸 뒤에 향리로 돌아온 신재효는 마흔 네 살부터 소리꾼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는 판소리를 정리하고 후계자를 키우는데 몰두하였다. 춘향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 심청가의 여섯 마당을 오늘날 명창들이 부르는 바와 같이 정리하여 완성시켰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신재효가 고종 21년까지 살던 집이라고 전한다. 사랑채만 남아있는 이 집은 철종 1년인 1850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인 1899년에 그의 아들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신재효의 집은 모양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요 민속자료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원래의 집은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한 운치가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6칸 집 곳곳에 남아있는 운치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一 자형 평면 초가로 지어진 이 집은 현재는 부엌 쪽에 초가 일각문을 두고 있다. 앞쪽에는 판소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담장 일부를 터놓았다. 왼쪽으로 부터 한 칸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대청 한 칸과 통 두 칸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통 두 칸의 방에는 판소리를 하는 모습을 한 사람모양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 선 돌로 쌓은 우물이 보인다. 부엌은 까치구멍을 넓게 놓아 시원하게 보인다. 부엌과 방 사이에는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들었으며,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았다. 대청은 마루방으로 놓았으나, 밖에서 보면 대청이란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집은 단출하면서도 소박하다.

부엌을 뺀 다섯 칸의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도왔다. 여기저기 많은 부수적인 장치를 하지 않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에는 옹기 두 개를 올려놓은 낮은 굴뚝이 눈길을 끈다. 현재의 연못은 집 앞에서 배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차게 되어있다. 하지만 삭막하게 마른 연못은 왠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물이라도 좀 채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광대가의 산실 신재효 생가

거려천지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요

둘째는 사설치레 그다음 득음이요
그다음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구성지고 맵시 있고

경각에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중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야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하략) / 판소리 단가 광대가 중





조선 고종 때 동리 신재효는 이집에서 광대가를 지었다. 광대가는 단가로 광대의 이론을 사설로 쓴 것인데, 광대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광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인물치례, 사설, 목소리, 너름새를 그 조건으로 들고 있다. 오래 전에 ‘중고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 집을 처음 찾은 후 벌써 몇 번째인지. 몇 번 보수를 한 것을 빼고는 처음 본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관람객들을 돕기 위해 판소리를 하고 있는 인형들을 전시했다는 것을 빼고는.



일생을 판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 동리 신재효. 고창에 많은 명창이 배출이 된 것도 신재효 선생의 그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집안을 돌아보면서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안내판이라도 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집을 돌아 나오는데 뒤편에서 판소리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광대가 한판이라도 좀 들을 수 있도록 시설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 가면 조각공원이 있다. ‘뚜라조각공원’, 아마 이 공원을 조성한 것은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장군의 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조각가가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원이 소재한 곳이 바로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 옆이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는 장군이 출생한 고창과 이사를 하여 산 정읍 두 곳에 있다.

뚜라조각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알아서 입장료를 내면 된다. 저팔계가 버티고 있는 입구에 돈 통을 놓고 성의껏 내라고 되어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의를 보일지는 모르겠다. 입구부터 쓰러져 가는 판자로 막은 오두막에 기대있는 여인상으로 시작해, 넓은 마당에 여기저기 수백 점은 될 만한 크고 작은 조각들이 널려있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조각품들이 널려있는 곳. 조각공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조각박물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작가가 일일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따로 수집을 해 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눈에 띤다. 그 중에는 정말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마당은 잔디를 조성해 놓고, 여기저기 조각품들을 늘어놓았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작품들이다, 처마에도 나뭇가지에도 그리고 철봉 틀에도 매달려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군상들. 그리고 테라코타로 조성된 흙기둥에 새겨진 수많은 사람들. 그 중 눈을 끄는 것은 커다랗게 조형에 된 아이들 모습이다. 앞에는 욕조가 있고 그 안에 오줌을 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자지러질 뻔 했다.



조각공원 입구에는 저팔계가 입장료는 성의껏 달라고 한다(위) 잔디로 조성한 광장에 늘어 놓은 작품들
 
오랜 시간 준비를 해온 것인지 벌써 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파손이 된 작품들도 보인다. 그리고 새로 칠을 한 것들도 보이고 있어, 이 조각공원의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 같다. 고창을 찾아간다면 아이들과 함께 역사공부를 겸해 찾아가볼만 한 뚜라조각공원. 오늘 그 안에서 또 다른 조각공원의 재미를 느낀다.



테라코타로 조성한 흙기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이 공원 내 곳곳에 보인다.(위) 그리고 벽돌로 만든 벽을 부수고 나오는 남자. 이런 힘찬 남성상들도 여기저기 보인다(아래)



색을 입혀 눈에 띠는 조각품. 남자 아이 셋이서 욕조에 오줌을 싸고 있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위) 복분자의 고장 고창다은 모각품도 보인다(아래) 이 두 가지의 조각품들은 최근에 새로 색을 입힌 것으로 보아 새롭게 보여진 작품인 듯 하다.




줄을 타고 오르는 군상들. 공원 안 여기저기에 보면 줄에 매달려 오르는 작은 조각상들이 널려있다. 처마 밑에도 나뭇가지에도, 철봉 틀에도 이렇게 많은 군상들이 줄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안간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각양 각색의 조각들이 나열되어 있는 뚜라조각공원. 아마 아이들과 함꼐 찾아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줄만도 하다. 더욱 옆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가 자리하고 있어, 역사적인 공부를 함께 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길을 나서 찾아보면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가 중요하다. 꼭 유명한 곳을 가야만 좋은 구경이 아니다. 문화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자만을 환영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