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쓴다. 무덤을 ‘유택(幽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영혼이 쉬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구조나 형태가 달라진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이나 동굴 등에서도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초기 형태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무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 널무덤이 유행한다. 널무덤이란 땅을 판 후 그 안에 주검을 넣고 널을 덮는 형태이다. 여기서 말하는 널이란 돌로 된 것을 말한다. 널무덤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지며, 그 뒤에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무지무덤,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묘의 형태인 고인돌

고인돌 등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든 형태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규모 분묘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산청군에 소재한 전 구형왕릉의 묘처럼 많은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석묘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분묘의 역사는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무덤의 형태로 보인다.

그 이전의 묘의 형태인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근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들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있다. 현재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육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을 보면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능지대나 바닷가 등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물을 사용해야 하는 인간들의 생활 때문에 이런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물이 있는 곳에 인류가 집단으로 서식을 하였고, 그런 곳에 고인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형이라고도 한다. 커다란 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삼면은 커다란 돌로 막고, 입구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가벼운 돌을 쓴다고 한다. 전라북도 고창군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지역이다. 고창지역 고인돌은 2003년에 205개 군집에 1,665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이후 2005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1,327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으며, 2009년 군산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유산으로 등제된 고창고인돌유적을 제외한 174개 군집에 1,124기가 보고되었다. 따라서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600여기이상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작은 안내판에 ‘도산리 고인돌 1km’라고 적혀있다. 이 도산리고인돌은 특별하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간 곳은 한창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 꽤나 거대한 탁자형 고인돌 한 기가 보인다. 이곳 고인돌은 아름답다고 하여, 많은 책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망북단’이라는 슬픈 이름도 가져

이 도산리 고인돌은 석축 위에 놓여있으며 주변에는 커다란 돌들이 널려있다. 그 중 한기가 탁자형으로 서 있는데, 굄돌의 높이는 어른 키만하다. 그리고 위에 올린 탁자형의 덮개석은 길이가 3.5m 정도에, 정면 입구의 길이도 2.5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의 두께도 50cm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이 탁자형 고인돌이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고인돌을 ‘망북단’이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 이 마을의 의병장인 송기상(1612 ~1667)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기상은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적을 향해 진군을 하던 중 삼전도의 굴욕적인 패배가 알려지자, 이곳으로 되돌아와 평생을 ‘망북통배’(임금이 계신 궁을 향해 날마다 곡을 했다는 뜻)를 했다는 것이다.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의 손길이로 짐작하시길... 

한 의병대장의 통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도산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1981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고창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자, 사적 제391호로 승격이 되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산리 고인돌. 주변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는 많은 나무들. 그 중에는 천연기념물도 있고, 지방에서 지정된 기념물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호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지정도 받지 못한 나무도 있다. 아직 나도 그 지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로 나누이는지, 수령이 오랜데도 지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등은 늘 궁금하다.

천연기념물이란 자연 가운데 학술, 자연사,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한 구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식물을 주체로 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노거수가 124건으로 1그루씩 지정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수종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종(樹種)으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은 19건이다. 이어 소나무종류가 처진소나무와 반송을 합해 18건이지만, 곰솔까지 포함을 한다면 24건으로 가장 많다. 그만큼 다양한 소나무가 지정을 받았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종류가 12건 등이며, 백송과 이팝나무, 향나무가 각 8건 정도이다.

귀한 몸으로 지정을 받은 나무의 종류는 다양하다. 회화나무와 털왕버들을 포함한 왕버들류, 비자나무, 푸조나무, 후박나무, 옴나무, 탱자나무, 팽나무, 망개나무, 측백, 갈참나무, 회향목, 올벗나무 등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외에도 특별한 것으로는 송악, 소태나무, 등나무, 배롱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의 조금은 생소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창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들만 만났다. 답사를 며칠 나가야 거목 한 그루를 보는 것이 보통인데, 이날은 열 그루에 가까운 나무들을 만난 것이다. 그 중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446번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멀리서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그냥 얼어붙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 멀리서 보이는 이 나무는 마치 우산을 쓴 모습이다. 나무의 생김새가 멀리서보아도 아름답다. 폭나무, 포구나무라고도 부른다는 팽나무 한 그루. 어딜 찾아보아도 이 나무가 도대체 몇 백년이나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아주 오래 묵었다는 것 밖에는.



한 걸음에 달려가 본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다. 팽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염소를 매어 놓은 줄에 걸린 것이다. 그 염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에 푹 빠져버렸다. 나무 가까이 기서 본다. 외과수술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생육이 좋은 나무이다. 어떻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나, 그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팽나무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 읽는다.

수동리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이곳이 바닷가였다고 한다. 간척지로 매립을 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배를 묶어두기도 했다니, 변해버린 주변 경관이 아쉽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을까?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높지 않은 둔덕위에 팽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지금도 그림 같은 모습인데, 예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수동리의 팽나무는 8월 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이 나무아래 모여 기원하던 당산나무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수동리 팽나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들 중에서, 가슴높이의 둘레가 가장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고 한다. 수세 역시 좋은 편이어서 팽나무 종을 대표할 만하다.

나무 주변을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이 나무에 빠져든다. 한편으로는 멀리 산줄기를 바라보고, 예전 바닷물이 들던 곳은 가슴이 시원하게 터질 수 있는 들판이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 줄기 여기저기 이상한 형상으로 옹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밑동 움푹한 곳에는 나무 스스로가 이름 모를 버섯을 키우고 있다.

나무 밑동에 붉은 옷을 입고 서있는 사람이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이다. 비교를 해보면 팽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나무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몇 날을 이야기를 해도 다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난 이 나무를 그렇게 불렀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군 삼인리에 소재한 선운사. 선운사 대웅전 뒤편을 보면 빼곡히 들어찬 숲이 있다. 언제 심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일설에는 신불로부터 선운사를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이다. 이 숲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5월 1일 찾아간 선운사 동백나무 숲. 약 2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집단으로 들어차 있는 곳이다.

동백나무는 차나뭇과의 상록활엽목이다. 나무의 높이는 5~8m 정도로 자라며,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으로 단단한 편이다. 선운사 동백 숲의 동백나무는 4월에 꽃이 피는 춘백이다. 동백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秋栢), 동백(冬栢), 춘백(春栢)으로 구분을 한다. 붉은 꽃이 피는 선운사 동백나무 숲.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동백 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분주하다.


산불로부터 선운사를 지키는 보호림

선운사 동백 숲은 산불로부터 선운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1597년인 정유재란 때 선운사가 거의 소실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쯤에 이 동백나무 숲이 조성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동백나무들은 아름다운 붉은 색 꽃을 가득 피웠다. 꽃들이 떨어져 여기저기 나무아래 흩어져 있다. 천 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길을 떠날 수가 없다. 많은 천연기념물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동백나무 숲은 충남 보령시 외연도의 동백나무 숲 등에



이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동백꽃이기에 그 꽃말이 ‘자랑’과 ‘겸손한 마음’은 아닌지. 화려함을 자랑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동백 숲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이치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석탄정. 남들은 석탄정이라고 하면 먼저 옛 노랫말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석탄정을 본다면 그런 노랫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입부터 벌릴 것이다. 마을을 들어가는 길 한편에 보이는 거목들이 우거진 숲.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정자 하나. 그것이 바로 석탄정이 운치있게 자리한 모습이다.


석탄정을 찾아가 제일먼저 느낀 것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주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그저 세월을 막아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정자 안에 걸린 수많은 편액들. 이 석탄정이 왜 그토록 발을 쉬고 싶었는지, 바로 이해가 간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들려 편안하게 발을 뻗고 세월의 흐름을 잊은 것일까?




석탄 류운선생이 건립한 정자 


석탄정은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에 자리한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다. 바로 석탄정이 그런 곳 중 하나이다. 주소를 잘못 찾는 바람에 만나게 된 정자. 석탄정을 찾아들어 슬그머니 남모르는 미소를 짓는다. 열심히 답사를 하다가보니, 이렇게 좋은 곳으로 안내를 했는가 보다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소득이기 때문이다.


선조 14년인 1581년에 지은 정자이니, 벌써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자이다. 류운 선생은 성격이 고매하고 학식이 높아, 청암찰방이라는 직책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동서로는 상풍루와 영월헌을 세우고, 정자 앞에는 조대를 세웠다고 한다. 주변에는 나무를 심어 풍취를 돋우었다고 하니,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수명이 그러하단 것을 말한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뿌리가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다 드러난 맨살을 보이고 있는 고목에서, 석탄정의 역사를 알수 있다. 이렇게 멋진 정자를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는 가운데 방을 들였다. 그래서 주변을 마음대로 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정자의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들였다.


풍취를 자아내게 하는 정자


그 높임마루 하나가 정자의 모습을 바꾼다. 이 높임마루가 아니더라도 방을 둘러쌓고 있는 마루에 앉으면 세상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덤벙 주초위에 원형의 기둥을 놓고, 팔작지붕으로 꾸민 정자는 그렇게 옛 풍취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일까? 사방을 둘러 걸린 편액들이 편안한 다리를 뻗은 나그네를 긴장케한다.





무엇인가 이 석탄정에서는 글 하나라도 짓지 않는다면, 댓돌 밑으로 내려가지 못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한바퀴 빙 둘러 걸린 수많은 편액들이 이곳을 자랑하고 있다. 석탄 류운선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은 것일까? 이곳을 둘러보면서 스스로를 나무란다. 과연 난 선생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간직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일까? 


마음을 읽을줄 모르는 새 한 마리가 고목의 가지에 앉아 요란하게 울어댄다. 아마 저 새도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끼지 못한 나를 탓하는가 보다. 오늘 이 석탄정에 올라 시름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그리고 숱한 답사길에 쌓인 피로도 내려놓고 가련다. 그것이 석탄 선생이 기다리는 바가 아닐런지. 석탄정에는 수많은 나그네들의 피로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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