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에 소재한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인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답성놀이란 일명 성밟기, 성돌기라고도 하며 부녀자들이 한다.

 

이 놀이의 목적은 대개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것이나,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1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유명한 곳은 개성, 고창, 영광이다. 고창의 답성놀이는 주로 부녀자들이 머리에 작은 돌을 이고 모양산성을 돌아오는데 3번 도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게 하면 소원성취를 하며 다리에 병이 없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는다. 머리에 이고 가는 돌을 떨어뜨리면 불길하고, 성을 2번만 돌고 와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헌 등 22개 전각이 있던 고창읍성

 

성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 등으로 소실이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바로 정문이자 북문인 공북루를 만나게 된다. 공북루 앞에는 옹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하였는데, 이러한 축성방법은 고구려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옹성위에는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성밖을 관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성문을 부수기 위하여 들어온다고 해도, 옹성에서 쏟아 붓는 화살과 기름, 돌 등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더욱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힘들다. 옹성에는 밖으로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현안과, 총안을 내어 놓았다.

 

 

공북루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옥사가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관옥 또는 원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사는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가 짓고, , 여를 구분하여 가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옥사의 주변에는 높은 담을 둥그렇게 둘러치기 때문에 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관리사무소 뒤에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향청은 지방의 방백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지방의 향리를 구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향청에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성안에서는 식수가 가장 중요하다. 오랜 시간을 적과 대치를 할 때는 식수가 없으면, 그만큼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약수터를 빗겨서 풍화루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풍화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기록에는 고창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다고 했다. 풍화루란 글 그래도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수령이 있던 고창읍성

 

풍화루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고창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이란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 현 등 각종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의 정면에는 평근당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백성과 가깝게 있으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헌의 옆에는 내아가 있다.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을 말한다. 흔히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별을 하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는 곳으로 이를 동헌이라고 하고, 살림을 하던 내동헌을 내아라고 부른다. 동헌의 앞쪽에도 숨겨 놓은 듯한 우물이 있다.

 

 

동헌에서 남서쪽으로 높은 곳에는 고창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중앙에는 몸채라는 정당(正堂)이 있다. 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궁궐을 에를 올렸다. 양편에 있는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고창객사의 현판에는 모양지관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고창을 모양이라고 했고, 성을 모양성이라고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객사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연못 조금 위편에 작청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작청에서 북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을 보면 관청이 있다. 관청은 관주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맡아하는 곳이다.

 

관청에서는 수령과 그 권속들, 그리고 빈객에 대한 예우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조달과 관리를 맡아하던 곳이다. 현재까지 성안에 자리한 복원된 건축물 돌아보았다. 관청에서 옆으로 난 소로길을 이용하면 성곽길을 오르게 된다. 올라가다가 보면 소나무 숲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는 한다.

 

 

치성을 쌓아 적을 공격

 

성 위로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치다. 고창읍성에는 6개소의 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치란 꿩을 말하는 것으로 성곽의 일부분이 밖으로 돌출이 되어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치의 용도는 상당하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치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하면, 적은 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고창읍성의 경우에도 지형지세를 이용해 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옹성에서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한 부분을 굴곡지게 쌓아 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천히 걸어 성의 남쪽으로 향하니 읍성의 동문인 등양루가 나타난다. 동문 역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수원 화성이 국가적으로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면, 고창읍성은 전라우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좌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 등 19개의 군과 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이 3년 동안을 쌓은 성이다.

 

성 밖에는 각 고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자 재현을 시켜 성 밖에 구간별로 세워 놓았다. 이렇게 민초들의 힘을 쌓은 고창읍성은 크지는 않지만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쌓은 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등양루는 동편 오르막에 세워져 있다. 등양루를 지나 동치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얼마나 잘 축성된 성곽인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문인 등양루를 지나 성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보면 동남치와 남치를 거친다. 그런데 고창읍성에는 남문이 없다. 일반적인 성들은 문이 동서남북에 있는데 비해, 남문이 없다는 점이다.

  

남치의 안쪽을 보면 상황사가 있다. 요즈음은 성황당이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이 있는 곳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성황사가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황사에서는 성황신을 내려 모시고 고을의 방백이 직접 제를 올렸다.

 

성황사를 거쳐 성곽을 타고 내려오면 서남치를 거쳐 서문인 진서루가 나타난다. 진서루의 형태는 북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옹성을 쌓아 놓았다. 진서루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공북루로 돌아오게 된다. 20여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창읍성. 그러나 성을 돌아보면 그 성을 쌓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축성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민초들이라고 달라질 수가 없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 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곽. 오늘 고창읍성은 오랜 역사를 그렇게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 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242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제109호는 어사각이다. 어사각은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7년간의 호남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분들과, 이 비보를 받고 자결한 부인들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어사각이란 말 그대로 임금이 내린 책을 보관한 전각이라는 뜻이다.

 

이 고창 어사각에 모셔진 의열들은 김유신장군의 후예로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金海金氏 判圖判書公派), 일명 삼현파(三賢派)의 절효공 김극일의 직계 근친 25의사와 5열부들이다.

 

 

선조가 서훈한 단서철권을 보관한 곳

 

어사각은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선조 38년인 1605년 4월 16일에 이들에게 선무원종공신록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다. 이어 영조 25년인 1749년에는 칙령을 내리어 각을 하사하여, 단서철권이란 왕의 옥쇄가 날인된 책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김극일의 가문은 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유신장군(수로왕 12대 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조와 고려조를 통해 많은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장수를 배출하였으며, 고려조에서 만도 정승 급 14명을 비롯하여 이름 높은 신하, 공이 큰 신하 10여명과 장군 8명, 학자 1명 등 숱한 인물을 내어 위세를 떨쳤다.

 

김극일은 고려 때의 이름난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그 둘째 아들 김맹은 조선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그의 세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문장은 물론, 과거에 올라, 김씨 3주(三珠)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써 문과에 급제, 예문관의 호당에 뽑혔다.

 

 

김극일의 본받을 만한 문중

 

이 문중에는 구국에 불타는 충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김극일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등 벼슬살이를 했는데, 당대의 명필로 그의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는 특히 유명하다.

 

고려말기 두문동 72학자중의 한분이며, 예의판서, 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낸 김진문의 막내아들인 김조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자격루, 간의대, 혼천의, 갑인자(활자)등을 장영실등과 함께 제작하여, 세종조의 과학 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문학으로도 그 재질을 발휘, 세종대왕의 아낌을 받았다.

 

김우항은 조선시대에 김해 김씨가 낳은 오직 하나뿐인 정승이다. 그는 숙종 때에 문과에 올라 부사,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호조, 병조, 형조 등 다섯 판서를 고루 지내고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고, 그가 사망했을 때 왕은 관을 하사하여 장례했다. 김홍복은 김우항의 숙부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을 지냈는데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극일의 문중에서 이름난 장군으로는 김경서와 김완을 들 수 있다. 또한 김자정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성종 때 노사신, 노희맹 등과 『신찬여지승람(新撰與地勝覽)』을 편찬했다. 김덕승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에 이르렀는데, 경사 등 모든 학문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조선시대 화가 중의 제일인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 역시 이 가문이다.

 

그런가 하면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을 집필한 김천택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도 이 가문의 사람으로 종교가로서 명망이 높다. 오늘날 김대건 신부를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삼고 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작은 어사각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어사각에 모셔진 김극일의 자손들이 7년간의 호남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조상들의 뜻을 고귀하게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남편들의 전사 소식에 장렬히 남편의 뒤를 따라 스스로 자결을 할 수 있었던 부인들의 기개도 집안의 내력이 아니겠는가?

 

 

이 작은 집 하나를 보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이런 험한 일이 닥쳤다고 하면 당당하게 목숨을 내놓고 구국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또한 남편이 장렬하게 순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킬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진 마음만은 변하지 않아야 올곧은 나라가 될 수 있단 생각이다. 오늘 우리는 이 어사각에 깃든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도솔천(兜率天)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대략 11~15㎞라는 설이 있다.

 

도솔천은 육계(六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으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도솔천에는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내원과 외원이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안 깊숙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에 자리한 선운사

 

고창 선운사 안으로 들어가면, 선운산 깊숙한 곳에 도솔암이 자리하고 있다. 선운산은 높이 336m이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운산의 주변에는 구황봉(298m)·경수산(444m)·개이빨산(345m)·청룡산(314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면 외원에서 내원으로 가는 길인가 싶다.

 

도솔암 극락보전을 지나쳐 위로 오른다. 극락보전은 아미타여래상을 주불로 모시는 곳이다. 흔히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이라고도 명명한다. 조금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절경들. 순간 자연에 압도당한다.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도솔암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시는 곳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용문굴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혀,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다가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어진 나한전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천년 세월의 마애불, 그 모습에 압도당하다

 

나한전을 지나면 깎아지른 바위 암벽에 새긴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을 만난다. 아마 도솔천을 오르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도움을 주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마애불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도솔암 마애불은 미륵불로 추정된다. 결국 미륵정토를 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연결이 된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지상 6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좌정하고 있는 미륵불. 그 높이가 5m, 폭이 3n나 되며 연꽃문양을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쪽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아마 이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 같다. 동불암이라는 누각을 세웠던 자리라고 한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이 모진 세상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인 도솔천으로 올라가겠다고.

 

 

 

도솔암 내원궁.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전각이 하나 보인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인지 염불소리가 청아하다. 상도솔암이라고 부르는 도솔암 내원궁은 바로 미륵정토인가 보다. 거대한 자연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전각을 지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주변 경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지장보살을 모신 내원궁. 보물 제280호로 지정이 된 이 지장보살은 고려 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이 내원궁이야말로 인간이 고통 받는 사바세계에서 가장 이상형의 피안인 듯 하다.

 

 

 

누가 세상에 태어나 고통을 받고 싶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복만이라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도솔암 내원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곳이 바로 도솔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마음 하나에 도솔천이 있음을 깨닫는다.

한옥의 맞배지붕 양편에는 지붕 용마루 끝에서 벽을 따라 내려오는 구조물이 있다. ‘풍판’이라고 하는 이 구조물은 바람을 막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람도 막고, 비바람에 건물의 벽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풍판은 대개 목재로 마련하고 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 88번지. 이곳에는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단군성전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10월 23일, 고창군에 일이 있어 갔다가 길가에 한옥을 보고 올라갔는데, 계단 입구에 단군성전이라는 석비가 보인다. 비지정문화재인 이 건물은 계단 위에 솟을삼문과 그 안에 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단군성전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비탈진 곳에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다.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이 찾기에 편할 듯하다. 맞은편에는 고창여고인가 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보니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때는 담장 밖을 몇 바퀴 돌아야한다.

그렇게라도 답사를 하는 것이 이제는 버릇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다가 보니, 뒤 담장에 붙은 밭에서 노부부가 고구마 수확을 하고 있다. 어르신께 말씀을 드렸더니, 일 년에 한 번 개천절에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분이 열쇠를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관리를 하는지 열쇠를 안 맡긴다는 것이다.




벗겨진 칠 속에 나타난 것은

“요 아래쪽에 낮은 담이 있어. 그리로 넘어가”

문이 잠겨 있더라고 말씀을 드리니, 어르신이 하시는 말씀이다. 딴 곳 같으면 월담이라도 하겠지만, 명색이 단군성전인데 어찌 담을 넘으랴. 이런저런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런데 돌아보다가 보니 풍판이 영 이상하다. 칠이 벗겨진 것도 목재와는 다르다. 뒤편으로 돌아 칠이 벗겨진 곳을 바라보니 아무래도 양철인 듯하다. 앞으로 내려와 솟을문을 보았다. 벗겨진 칠 안으로 찍혀있는 글씨가 철판에 찍는 글씨이다. 풍판을 양철로 해놓았다. 비바람에 오래 견디어내도록 그리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단군성전인데, 그 건물의 풍판을 양철조각으로 해 놓았다니.




그래도 이 나라의 정신적인 지주인 단군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단군의 후손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단군을 모신 사당의 건물, 양철로 마련한 풍판은 칠까지 벗겨져 흉물이 되었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이야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양철 풍판을 보고는 울화가 치민다. 비지정문화재라고 해서 이렇게 대우를 하는 것일까?

지정, 비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군의 제를 모시는 곳을 이런 식으로 홀대를 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의식이 없어도 그렇지, 어찌 풍판을 양철로 댈 생각들을 한 것인지. 큰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제발 제대로 된 풍판하나 마련해주길 원한다. 앞쪽 학교의 학생들이 이런 몰골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지. 낯이 뜨거워 오래 지체할 수가 없다.



참 이런 정체성 없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것인지. 도대체 이런 황당한 일을 만날 때마다, 답사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리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비한국적인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지난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만 둘러본 날이었다. 아마도 하루에 수령이 꽤 오랜 나무들을, 10여 그루는 보았을 것이다. 그 중 한 그루가 바로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313-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83호인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이다.

‘이팝나무’란 이름은 ‘이밥’ 즉 ‘쌀밥'과 같은 꽃이 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즉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이는 것이, 마치 쌀밥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여름이 시작될 때인 입하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중 작은 중산리 이팝나무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넓은 공원과 같이 곳이 있고, 마을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나무들을 심어놓았는데, 그 가운데는 작은 이팝나무들이 보인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수령이 약 250살 정도로 보이며, 나무의 높이는 10.5m 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2.7m 정도이다.

중산리는 마을을 들어서는 도로보다 낮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산리 마을 앞의 낮은 지대에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모습은 가지가 고루 퍼져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먼지 등으로 나무의 생육상태는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중산리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들 가운데, 작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저 나무에는 전설이 없어. 우리도 안타까워’

현재 우리나라에는 7그루 정도의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지방 기념물 6그루를 합해, 모두 13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이팝나무들 중에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6호인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5호인 김해 신천리 이팝나무는 한쪽 가지가 길 건너 우물을 덮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우물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2월 말에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는데, 이곳의 말로 ‘용왕(龍王) 먹인다’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14호인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모구 7그루가 지정이 되어있는데, 마령초등학교 담장 곁에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팝나무를 ‘이암나무’ 또는 ‘뻣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팝나무가 모여 자라는 곳은, 어린 아이의 시체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아기사리’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그 마을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산리 이팝나무에는 그 어떤 전설도 전하지가 않는다. 마을 앞 정자에서 쉬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중산리 이팝나무에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가 없는지, 말씀을 드려보았다.

“저 나무에는 아무런 전설도 없어”
“대개 천연기념물에는 무슨 전설 등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말여. 우리도 저 나무에 무슨 이야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어. 우리들도 참 안타깝지”
“저 작은 나무들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요?”
“글쎄, 사람들은 저 큰 나무 자식이라고 하는데, 딴 곳에서 갖다 심은 것 같아”

그 외의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천연기념물을 만나 무엇인가 잔뜩 기대를 걸었는데, 아무런 이야기 하나 못 건지는 이런 날은 맥이 풀린다.


우리나라의 크고 오래된 이팝나무는 꽃이 많이 피고 적게 피는 것으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비의 양이 적당하면 꽃이 활짝 피고 부족하면 잘 피지 못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강수가 필요하므로 이팝나무의 생육에 따라 풍, 흉년을 미리 점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을 어르신들조차 전설 하나 간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중산리 이팝나무. 그러나 그 나무의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그만해도 마을의 자랑이 아닐까? 중산리를 떠나면서 나무가 오래도록 잘 자라기만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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