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산15-6번지. 좁은 마을 길 도로변 밑에 석불 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서 있지를 않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찾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 마침 선원사 최인술 봉사단장이 이곳을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과 함께 찾아와 보았다면서 안내를 하는 바람에 만날 수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상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입상과 광배가 조ㅘ를 이루고 있다. 언필 보면 떨어진 듯도 하지만, 광배를 다듬고 그 앞에 석불입상을 부조한 것만 같다.


낙동리 석조여래입상의 앞과 뒤

심하게 훼손이 된 안면

숲 속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가에는 이곳에 문화재가 서 있다는 안내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호 철책을 친 안으로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뒤편에 세운 광배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깨어진 곳도 없다. 그러나 정작 석불의 안면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볼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해, 상당히 세심한 조각수법을 보였던 것만 같다. 어깨선이 유려한 것이나 발 밑까지 흘러내린 법의의 옷 주름이 부드러운 U자형으로 퍼진 것 등을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석조여래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외롭게 서 있엇을까?




석조여래입상의 뒤편에 세운 광배는 온전하다.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꽃과 불꽃 무늬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배의 뒷면을 잘 다듬은 것이나, 광배의 조각들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이 수준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석조여래입상을 찬찬히 훑어본다. 얼굴의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균형이 알맞게 표현되었다. 두상의 크기와 알맞게 조형된 귀, 그리고 둥글게 형태를 지닌 얼굴.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가까이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손은 다 마멸이 되어 보이지가 않는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고, 법의를 걸친 어깨선은 부드럽게 표현이 되었다. 법의의 주름은 넓게 퍼져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발목 부분부터는 주름을 잡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이라면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같은 수준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심하게 마멸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안면, 잘려나간 손 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숲 속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남원 덕동리 석조여래입상. 아마 이 곳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벌써 천년 세월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 인근에 절터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지난날과, 분간이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괜한 한숨만 토해낸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바로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라니.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원주시 소초면 소재지에서 동쪽을 향해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옛 도로가 우측으로 빠지는 곳이 있다. 소초면 평장리인 이곳에는 건축물 폐기 업소가 있는데, 그 뒤편 계곡에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다. 이 곳에는 높이 3.68m, 넓이 6.2m 크기의 암벽이 있고, 그 암벽에 가득히 보살좌상을 조각하였는데 보살의 높이는 3.5m이다.

이 보살은 옆으로 한편 무릎을 세우고 앉은 측면상으로, 머리에는 보관을 썼는데 하단에 좌우로 관대가 보인다. 이 마애보살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비교적 얇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된 이 마애보살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상으로 조각이 되었다.


넙적한 암벽에 선각으로 그려진 마애공양보살상과 보살상이 있는 좁은 계곡

사실적인 표현이 뛰어난 마애보살상

오른쪽을 향해 비스듬히 앉아 팔을 어깨까지 올려, 넓은 둥근 쟁반 같은 것에 꽃으로 추정되는 공양물을 받치고 있다. 머리에는 일반적인 관을 쓰고 있으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 만큼 늘어졌다. 이 보살상은 모발의 표현이 부드러우며, 상호는 원만한 상으로 양미간 등은 잘 남아 있으나 입은 약간 파손이 되었다. 목에는 조금 밑으로 삼도를 그려냈다.

옷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3~4가닥의 선으로 표현을 하였다. 하체의 치마 역시 간단한 선으로 그려냈으며, 바위면의 밑 깊게 패인 곳까지 선을 유려하게 연결하였다. 공양물을 받치고 있는 양 팔에는 팔찌가 끼어져 있으며,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흔히 공양상이 취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이 공양보살상은 오른발을 구부려서 앉고, 왼발은 직각되게 펴서 왼손을 받치고 있다.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조각기법이다.




마애공양보살상이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계단과(맨위) 공양물을 받치고 있는 부분

바위에 파진 구멍은 무엇일까?

이 마애보살입상에서 특이한 것은, 왼손을 넓게 펴고 그 위에 연꽃 등의 공양물을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이것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당대에는 보기 힘든 것이다. 흔히 구례 화엄사 석탑 앞에 앉아있는 공양상이나, 강릉 지역의 석탑 앞에 앉은 공양상에서 보이는 석조물과 동일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공양보살상은 넓은 암벽에 선각으로 처리를 했으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마애공양보살상을 바라보면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암벽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다. 한 두 개가 아니고 얼굴부분에 집중적으로 대여섯 개의 구멍을 뚫어, 얼굴에 인중과 입이 파손이 된 상태이다. 그리고 앉은 부분에도 여기저기 구멍이 보인다. 왜 이런 구멍이 있을까?



마애공양보살상을 새긴 바위에 난 구멍. 누군가 날카로운 것으로 쪼아낸 것 같다.

처음에는 보살상을 선각하는 과정에서 장인의 도구에 의해 뚫린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마애불을 선각하는 장인 같으면, 입이나 볼 등에 구멍을 뚫을 이유가 없다. 이 마애보살상은 선각을 했지만 그 조각 수법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정도의 마애불을 조성할 수 있는 장인이라면, 적어도 얼굴부분을 표현 할 곳에 구멍을 낼 리가 없다.

결국 이것은 누군가가 마애불을 훼손할 목적으로 일부러 구멍을 뚫었다는 생각이다. 일부러 훼손을 한 것과 자연스레 떨어져 나간 것은 형태가 다르다. 이 구멍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누군가 뾰죽한 공구를 이용해 파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훼손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화재의 훼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문화지킴이가 되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내는 일 뿐이다.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에 새긴 용머리에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보인다

  
▲ 부도 부도에 새겨진 용의 조각. 발로 불꽃이 이는 여의주를 잡고 있다

  
▲ 용꼬리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용의 조각 중 꼬리 부분. 두 마리의 용꼬리가 힘차게 감고 있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자물쇠 문양 상대석에 조각된 자물쇠 문양인 문비.

  
▲ 영창 부도의 상대석은 상징적으로 사리가 있는 곳이다.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그 반대편에 조각된 영창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 사천왕상 상대석 8면 중 사면에는 사천왕들이 부도를 지키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광종 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고달사가 폐사가 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보다. 고달사에 남아있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과 비교를 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역시 비천인상이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다

  
▲ 비천인상 머릿돌의 밑면에 새겨진 비천인상.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완성시킨 아름다움의 결정체다


천년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며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그래서 고달사지를 찾을 때마다 일부러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그러한 아름다운 탑을 보기 위해서다. 더욱 이 부도를 눈여겨보는 것은, 앞으로 또 천년을 그렇게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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