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인가 찾아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양평의 보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보산정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이,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고려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 무안 박씨의 선조인 간의내부 송림공이 이곳으로 낙향을 하여, 시회장(詩會場)으로 보산정을 지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옛 정취를 잃은 정자

 

보산정은 양평군 단월면 보통리 산33 부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대성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입향조가 14세기 후반에 터를 잡아, 대대(大垈) 즉 '한터'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무안박씨가 25대 이상을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정자는 송림공이 정자를 지은 후, 송림공의 6대 손인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원겸의 수학당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그 뒤에 저명한 유림의 학자들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장으로 활용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 건물은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절경에 자리한 역사가 있는 소중한 정자를, 시멘트로 복원하여 아름답고 고풍스런 옛 정취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보산정이 서 있는 한터는 무안 박씨들이 25대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눈길이 아름다운 보산정

 

보산정이 있는 한터는 역사가 깊은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월면의 면소재지인 이곳은 둘레 6 ~ 8m 는 됨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보산정은 면소재지로 들어가는 길 우측 편 동산에, 부안천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주변으로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다. 입구는 돌담에 일각문을 세워놓았다. 양편으로는 노송이 우거지고, 눈이 쌓인 길을 걸어 올라간다. 돌계단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를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미끄럽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낭패를 당할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을 보니 밑으로는 무안천이 흐르고, 경사진 비탈에 노송이 가지를 뻗고 있다. 여기저기 잔 소나무의 가지들이 부러져 있다. 아마 지난 번 내린 눈으로 인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졌는가 보다.

 

정자 위로 오르니 현판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최근에 새로 쓴 현판들이다. 현판에 쓰인 날짜를 보니, 2006년에 써 붙인 것이다. 아마 그 해에 이곳에서 시회라도 열렸는가 보다.

 

보산정으로 오르는 일각문. 보산정은 무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눈이 쌓여있는 보산정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이 현판에도 용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려의 끝남을 서러워하는 시가 마음을 아프게 해

 

그 현판의 글 중에 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고려 500년 사직을 이별하고, 이곳으로 내려 온 송림공의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500년 도읍터에 날은 저무는데

우러러보던 까마귀는 뉘 집에 머물런가.

임 떠난 외로운 신하는 편한 곳에서

서산 저편 올라 큰소리 외쳐 보고 싶구나.

 

아마 송도를 떠난 송림공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도 늘 임금이 계셨던 송도를 바라보고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60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나그네의 눈에 들어오는 주변은 그 풍광이 그대로 남아있건만, 임을 그리던 마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산정의 안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새롭게 조성한 현판들이다.

보산정의 천정에 단청으로 그려놓은 용.

 

정자의 현판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정자의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있다. 아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이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25대 이상을 살아오는 무안박씨의 문중에서, 입향조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보산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무안천에 내려앉은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찬바람을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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