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한 마디로 충격이였습니다. 20여 년간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나름 꽤 많이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주 고달사지에서 만난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탑을 보는 순간, 내 20년간의 답사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적기 위해 오랫만에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시간에 쫒긴 것이 화근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꼼꼼히 답사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정말 마음을 놓고 문화재를 만나고, 글을 쓸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번지 혜목산 고달사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고달사지 절터 안에 있는 석조 유물들 가운데, 탑비의 귀부, 이수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몸돌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귀꽃을 이중으로 새긴 지붕돌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부인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약간 위로 향하고 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끝에는 꽃장식인 귀꽃을 큼지막하게 새겨 넣어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 위에도 지붕돌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인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탑신은 4면에는 문 모양을 새겨 넣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구름 위에 올려놓은 사천왕상은 힘이 있게 조각이 되어, 탑 안에 있는 복장물을 지키는 듯하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 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기단부의 조각이 뛰어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인 앙화가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중대석에는 윗부분에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한 조각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들이. 그 사이에 가득 새겨 넣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위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다.



기단부에 들어있는 귀부, 무지의 극치인 나

그동안 전국을 돌면서 숱한 문화재와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한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조금은 높아진 듯도 하다. 스스로도 문화재에 대해 ‘수박 겉핥기’는 조금 지났다고 생각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우리 문화재에 미친 사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종대사탑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한 면에 세 마리의 용머리가 보이는데, 중간에 용머리가 크고 한편으로 돌려져 있다. 벌써 몇 번인가 본 원종대사탑이다. 한 번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만큼 부끄럽다. 그 가운데 목을 비튼 용두는 바로 귀부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 용머리 밑으로는 거북의 등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편으로는 앞발이 힘차게 표현이 되어있다. 한 마디로 놀라움이다. 왜 아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바로 귀부의 앞부분이 조각이 되어있다. 탑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곳에는 귀부의 뒷부분인 꼬리와 귀갑을 선명하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이다. 탑의 기단부에 귀부를 넣어 놓은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 몇 번을 보았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니. 그동안 나름대로 문화재를 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다시 살펴야겠다. 20년간의 답사가 이렇게 부끄럽게 무지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더 늦지는 않았으니.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

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얼마 전 유기견에 대한 글을 올렸다.(버려진 녀석을 걱정하다 의 글) 많은 분들이 그 작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사연을 남겨주었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다행하게도 동물병원에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다리에 있던 철사라고 생각했던 것도 나무가지였다는 것이다. 주인을 잃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녀석이, 자꾸만 눈에 밟혀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했다.

의견을 남겨주신 분 중에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연락처까지 남겨 놓은 분들도 계시다. 오늘 아침 여주에 있는 아우에게 그 녀석이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블로그를 들어가 보면 메시지글에 키우겠다는 분이 계시니, 연락을 취해보라고 했다. 그래놓고는 연락이 올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구조를 하기 전 버려진 곳의 풀밭에 힘없이 있는 녀석입니다

동물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에

오후 8시가 다되어 가는데 연락이 왔다. 녀석을 키우겠다는 분과 통화를 하고 난 후, 여주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디?”
그냥 차에 태우니까 바로 난리를 치데요. 창문을 발로 긁고

왜 그랬지

아마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그랬나 봐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더니

말도 말아요. 동물병원에 가서도 그렇게 활달하게 돌아다녀요


얼마나 그곳에서 오랜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일까? 그런 춥고 배고픈 것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일까? 동물병원에 가서는 언제 그렇게 풀죽은 모습으로 있었냐는 듯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다. 아마 이제 주인이 곧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개를 키우겠다는 분이 곧 데려갈 테니, 녀석의 건강을 좀 챙겨보라는 부탁가지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는 한시름 놓았다.

녀석은 나이가 꽤 먹었다고 한다. 그런 녀석이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만 보아도 목을 움츠리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은, 그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았는지도 모르다. 녀석을 길가에서 만난 날도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키지 않는다고 빵빵거리면서 욕을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더 걱정스러웠다.


집으로 데려 와 먹이를 먹고 있는 사진입니다

두 가지 주인이 있다.

녀석은 아마도 그곳 어디를 다니는 사람이 유기를 한 것 같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추운 길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올 겨울처럼 추운 날을 버티기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보듬고 키우겠다는 분이 나타난 것만 해도 녀석의 복이란 생각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마음이 따듯하고 정말 동물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또 한 가지는 개만도 못한 사람이다. 바로 이렇게 키우던 개를 유기하는 사람들이다. 키우다가 못 키워 내다 버릴 것이라면, 아예 집안에 들이지를 말아야 한다. 그동안 방송 등을 통해 수 없이 길가에 내버려진 유기견들을 보면서, 참 마음 속으로 안쓰러워했다. 좋을 때는 내새끼’ ‘내딸이라는 표현을 일삼으며 너스레를 떨다가, 어떻게 그렇게 길가에 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동물 병원으로 옮겨진 후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이 엄마라고 부르면서 키우던 사람들. 자식과 같다고 말만 번지르르 하는 사람들. 가족이라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 그렇게 하고도 스스로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개보다 못한 인간이 아닐까?

이번에 만난 녀석으로 인해 생각을 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마음이 따듯한 분들이 계시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녀석. 앞으로는 정말 행복한 날이길 기원한다. 끝으로 녀석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걱정을 함께 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동물병원으로 옮기게 해주신 분, 고맙습니다. 그런 아픈 사연이 있어 녀석과의 인연이 생긴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을 보내주신 상교리 지우재의 지우선생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이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눈이 덜 녹은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부릅뜬 눈과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귀부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바로 귀부의 머리이다.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귀부의 왕방울 눈을 보면, 무섭다기보다 친근감이 먼저 앞선다. 아마도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닌지. 커다랗게 뚫린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길지 않은 목이 몸체에 달라붙은 듯 표현을 해, 이 귀부의 힘을 더 느끼게 만든다. 마치 강인한 역사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등에는 이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그 육각형의 귀갑문이 중앙으로 가면 한 단계 높게 조각을 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위에 비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비좌를 돌출시켜 조각하였다.      




이수의 용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귀부의 머릿돌인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앞면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 한 옆에 따로 보관을 해 놓았다. 이 이수는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이 넘친다. 금방이라도 이수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면의 용은 좌우로 밖을 향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뒤편쪽의 용은 안을 향하고 있어, 앞뒤의 용이 다르다. 옆면을 보면 비늘이 선명한 용의 몸체가 뒤틀려 감아 올라간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이수의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면서 조성이 된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하면 975년에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대사가 입적한 후 8년이 지나서 세워진 것이다. 이 귀부와 이수의 형태는 인근 원주의 거돈사지 등에서 발견되는 원종대사의 승묘탑비 귀부와는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탑에서 보이는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재답사. 그래서 고달사지의 귀부는 늘 발길을 붙잡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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