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참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만하다. 도대체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쓰레기통 취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다. 83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았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가 그동안 몸돌을 복원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한 혜목산 고달사지 석조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저만큼 새로 몸돌을 치장한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보이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안에 무엇인가가 널려있다.

 

 

이 석조는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를 쓰레기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석조 안에 무엇인가를 담은 봉지와 종이박스, 음식을 조리하는 휴대용 열기구 등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인가 이곳에서 컵라면 등을 끓여먹고 그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다. 라면박스 안에는 라면도 몇 개 들어있고, 휴대용 조리기구와 그 케이스도 있다.

 

담배꽁초도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라면 등을 끓여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 난 것들을 하필이면 유형문화재인 석조 안에다 놓은 것일까? 마침 일요일을 맞이하여 고달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은 어이가 없다면서 혀를 찬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문화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고 난 것들을 이렇게 문화재 안에다가 버젓이 쌓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이 현장에도 문화재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고작 이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니.”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 안에다 모아놓은 쓰레기들과 조리기구.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관리자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다.

사람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해괴한 생각 말이다. 아마도 찜통더위가 계속되면서, 하도 햇볕에 싸돌아다니니 머리에 이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그 절터 한 복판에 장방형의 석조물 한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난 이곳을 들릴 때마다 이 석조대좌 위에 올라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올라가 하늘에 흐르는 구름만 바라보아도 바로 부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가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해대는 것도, 무료한 답사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찜통더위를 잊으려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석조대좌 하나만으로 보물이 되다니

 

이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가 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이 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역작인 석조대좌, 정말 대단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받침돌은 상중하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방형의 종첩과 연꽃과 안상을 교차적으로 조각하여, 밋밋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승탑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같은 고달사지 내에 소재한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대좌의 축조시기가 승탑과 같은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석조대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이 석조대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8월 4일의 찜통더위에 찾아간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석조대좌로 인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힘든 답사길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10일이 넘게 계속된 찜통더위. 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4일에 찾아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사적 고달사지. 그곳에서 난 땀을 비오 듯 흘리면서도 그늘을 찾아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찾아간 고달사지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을 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추시하고 대사의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다.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 후, 17년 뒤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벌써 몇 번째 찾아간 탑비, 그런데 이럴 수가

 

이 비는 몸돌은 무너져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이곳 고달사지에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몸돌인 비문을 볼 수가 없어 매번 갈 때마다 아쉬움이 컸던 원종대사탑비였다. 언제가 답사를 함께하던 동료 한 사람이, 도대체 왜 그렇게 갈 때마다 사진을 많이 찍어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혹 무엇이 변하지는 않았는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탑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한 장씩 찍어댄다. 40도를 육박하는 땡볕에서 사진을 찍다가보니, 이미 몸은 땀으로 다 젖어버렸다. 얼굴과 등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닦을 엄두도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이걸 왜 보지 못했을까? 지난번에는 제대로 잘 찍었었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문화재 이야기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이 비에 조성된 거북의 머리는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머릿돌인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두의 이는 큼지막하니 두텁게 표현을 하였고, 콧구멍을 크게 뚫렸다. 영화에서처럼 이 콧구멍에서 불이라도 뿜어대는 것일까? 눈썹은 짙고 굵게 표현을 하였으며, 왕방을 눈은 금방이라도 사람에게 위압을 줄 것만 같다. 귀두를 살펴본 후 그 위에 비문을 올려놓았던 장방형의 비좌를 살펴본다.

 

비좌는 받침돌과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이중의 육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된 귀갑문을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켰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는 이 비좌를 놓치고 말았다. 비좌에 새겨놓은 문양을 돌아보다가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더위먹고 내가 제대로 살 수는 있을까?

 

꽃과 구름문양을 새겨 넣은 비좌의 밑면에도 세세하게 조각을 해놓았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섬세함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이수를 보다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몸을 꼬아 용트림을 하는 조각의 놀라움이다. 어찌 그리도 섬세하게 표현을 해 놓았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비좌의 밑에도 이수의 밑에도 아름답게 조각을 한 문양들. 그런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 걸음을 옮기면서 되뇐다.

 

“이 문화재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참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라고 생각이 든다. 문화재 답사는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만일 누가 이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에 답사를 하라고 시켰다면, 길길이 뛰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답사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전생에 내가 우리 문화재에 큰 잘못을 했던 것만 같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마도 과거에 우리 문화재를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던 사람이었을 것” 이란다. 전생에 그런 죄를 지은 업보로, 이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을 문화재를 찾아디닌다는 것. 그러지 않고서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더우나 추우나 그렇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야 알 수 없으니, 그만해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을 것인가?

 

 

하기야 지금도 그런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사람들.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문화재를 방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중한 문화재를 도굴하여 몰래 치부를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다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할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참 고맙고 또 고맙다.

 

문화재의 보고 여주 고달사지

 

사적 고달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사찰이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 그리고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 등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사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신라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요즈음 고달사지를 가면 또 다른 발굴작업을 하고 있어, 고달사지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문화재가 출토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전 고달사는 한강을 끼고 있던 흥법사와 법천사, 거돈사, 신륵사 등과 함께, 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두 점의 석조가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어 사용된 수조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 하거나, 곡물을 씻거나 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수조는 일반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석조 또는 목조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기거하는 건축 공간에 조성하였다.

 

새롭게 보인 고달사지 석조

 

고달사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가-4 건물지에서 발견 된 석조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한 돌로 치석, 조성하였다. 이 석조는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그 규모는 장변 321cm, 단변 149cm, 높이 98cm 이다. 석조는 한 돌로 치석되었으며, 평면이 긴사각형으로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인상을 주고 있다.

 

 

 

33도를 웃돈다는 8월 4일. 고달사지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석조 앞에는, 예전 답사 때 볼 수 없었던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석조를 설명하는 이 안내판에는 석조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석조를 살펴보니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석조를 보았지만, 이렇게 안내판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화재를 자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쌀을 씻기 위한 석조인 듯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 에서도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고달사지에는 또 하나의 석조가 있다. 한편이 심하게 훼손이 된 또 하나의 석조는, 지금은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옮겨 간 쌍사자 석등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이는 예불을 드리기 전 손을 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석조는 건물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쌀을 씻기 위한 것이나, 식수를 담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석조가 쌀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면, 당시 고달사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는 고달사지 석조, 문화재는 보면 볼수록 눈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만큼 많이 알아가기 때문이다. 고달사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조로 인해, 과거 고달사의 또 다른 일면을 유추해 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찜통더위마저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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