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그 안에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 하나하나에는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것은 상반을 초월한다. 내가 정자를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야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있는 자들이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본이 되게 하려고 많은 애를 쓴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마음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심수정(心水亭).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세상 탐욕에서 멀리하다 보니, 이런 아름다운 정자가 생길 만도 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정자

 

중요민속문화재 제81호로 지정이 된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심수정.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초입 우측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굵은 줄기에 이끼를 가득 안고 있는 집이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가 않은 집, 바로 심수정이다.

 

심수정은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다. 조선 명종 15년인 1560년경에 지어졌으니 벌써 450년이 지났다.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을 대신하여 벼슬길을 마다하고, 나이 드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모를 모신 이언괄. 아마 그 마음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럽고 추하게 세속에서 탐하는 벼슬을 마다하고, 흐르는 물에 씻듯 모든 것을 다 씻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마음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정자가 바로 심수정이다.

 

 

 

벼슬을 버리고 효를 택한 마음 심수정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벼슬에 탐닉을 한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온갖 추하고 역겨운 인간들이 자리를 탐하면서도, 스스로 반성을 할 줄 모르는 모양새를 보면 이 심수정이 더욱 빛이 난다. 모든 여건이 다 만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모를 위해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할 수 있는 이언괄의 마음이야 말로, 바로 맑은 물이라는 생각이다. 심수정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명종 때에 처음으로 지은 심수정은 철종 때에 이르러 소실이 되었다. 그 후 191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심수정은 아름답다. 그 안에 배인 마음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7칸 대청에 양편으로 방을 둔 팔작집이다. 서쪽 방 옆으로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를 두었다. 심수정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누마루에 있다. 3면이 훤히 트인 누마루에 오르면 양동마을이 다 보인다. 아마 이 누마루에 올라 이언괄의 효심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심수정, 이언괄이 그러했다. 벼슬길이 보장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을 대신해 노모를 극진히 모시기 위해 벼슬을 마다한 이언괄. 그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정자 하나가 이토록 먼 길을 찾아 온 나그네를 기분 좋게 하다니. 그래서 정자기행이 계속되는가보다.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때 이곳 정자에 올라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좋다. 아마도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어찌 이 불편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심수정 누마루에 더럽혀진 마음 한 자락을 꺼내어 훌훌 털어본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천연기념물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나는 천연기념물을 만날 때마다 곤욕을 치른다. 한 마디로 그 나무에 대해 감칠맛 나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경우에는 그래도 워낙 많이 보아온지라 조금은 알 수가 있지만, 그 외에 나무에 대해서는 고작 할 수 있는 설명이 자료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웅장하다'거나 '보기가 좋다' 혹은 '소중하다'가 내 지식의 끝이다. 조각자나무에 대한 지식도 그러하다.

 

 

독락당 안에 자리한 천연기념물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독락당 뒤편에서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15호 조각자나무. 이름부터가 생소한 이 나무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경계로 하는 울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약 470년 정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5m에, 둘레는 5m 정도이다. 이 조각자나무는 중국산으로 회재 이언적이 중국사신으로 다녀온 친구에게 받아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조각자나무(Gleditsia sinensis Lam)는 콩과의 갈잎큰키나무이다. 높이가 20 ~ 30미터까지 자라는 조각자나무는 껍질은 흑회색이고 줄기나 가지에 가시가 돋는다. 독락당 조각자나무에는 원줄기에 길이 10㎝, 지름 1㎝정도의 갈라진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소엽은 타원형 내지 피침형이다. 가장 자리에는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조각자나무는 황록색의 꽃은 6월에 피고, 꼬투리는 편평하며 길이 20 ~ 30㎝, 너비 3cm로 곧고 쪼개면 매운 냄새가 난다. 종자와 가시를 모두 약용으로 한다. 독락당 조각자나무를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바람에 가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독락당 울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조각자나무는 독락당 뒤편의 담을 안으로 돌려쌓아 놓은 곳에 소재한다.

 

나무 앞에는 보호철책을 둘러 이 나무를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다.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나무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천연기념물을 촬영을 할 때는 잎이 무성한 계절에 다녀야 하므로 시기적으로 맞추기가 힘들다. 더구나 독락당의 조각자 나무가 있는 울 안은 들어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담 밖에서 촬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 있는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데 가장 어려움은 바로 이런 점이다.

 

약용으로도 사용한 진귀한 나무

 

조각자나무는 가시와 잎 등이 모두 약용으로 사용이 된다. 중국 금세기 최고 최대의 중약학 성서라고 일컫는 <중약대사전>에는 조각자의 효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조각자의 가시는 일 년 내내 채취할 수 있으나,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채취시기로써 적당하다. 이 가시의 성분은 플라본 배당체, 페놀류, 아미노산을 함유한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물에 불려서 얇게 썰어서 햇볕에 말린다. 이 가시의 효능은 급성편도선염, 옹종, 창독, 여풍 등과 태반이 나오지 않는 증상을 치료한다. 조각자나무의 열매를 ‘조엽’이라고 하는데 맛은 매우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 풍담, 습독을 제거하고 기생충을 구제하는 효능이 있다. 가래를 삭이는 작용, 항균작용, 회충성 장폐색증, 귀지가 막힌 증상, 중풍으로 인한 안면 신경 마비, 돌발적인 두통, 해수 및 가래가 끓는 증상, 개선과 나병을 치료한다.

 

이와 같이 조각자나무는 모든 것을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나무라는 것이다. 나무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독락당 조각자나무의 가치를 잘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면 생물학적이나 역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산재해 자라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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