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를 담고는 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바쁘다.

 

수많은 문화재 중에는 갖가지 사연을 지닌 것들이 많다. 떄로는 해학적인 것도 있지만,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것들도 있다. 내용이 가슴저리기도 하고, 볼썽사납게 흉물로 보낸 현재의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재답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4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문화재를 만났을 때의 행복함. 그런 것을  항상 느끼기게 발길을 멈추지 못하는가 보다. 정혜사지 석탑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야말로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석탑이 있을 수 있나? 전국을 그렇게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석탑이 있었다니.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85%가 불교문화유물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 중에서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조를 거치는 동안 불교가 흥성을 했기 때문이다. 천년 이상의 세월을 이 땅에 뿌리박은 불교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물을 창츨했기 때문이다. 행여 이 시대에 종교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4대강 개발을 한다는 구실로 이러한 문화유산이 훼파가 된다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보 제4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1층 몸돌에는 4방에 감실이 나있다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과연 이 석탑의 장인이 누구였을까?
 
 

정혜사지 13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우리 전통가옥들이 아직도 잘 보존이 되어 있다. 대개는 중요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 자료 등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 집들이다. 요즈음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보존을 해야 할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이 집들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일반적인 모습 외에 그 나름대로의 멋을 지니고 있다. 그 멋은 무엇일까? 집의 소개는 안내판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이미 잘 나와 있다. 그래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쉽게 넘겨서는 안 될, 그 숨겨진 멋을 찾아본다는 겻은 고택답사의 또 다른 재미이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온기가 서린 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 ~ 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사랑채다. 조선조 중종 27년인 1532년에 세운 집이니 벌써 5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집이다. 독락당은 중요민속문화재가 아닌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 있어, 남다른 집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독락당은 사랑채인 독락당 건물과, 선조 33년인 1601년 이언적의 손자인 순과 준 두 형제가 화의문을 작성하고 지은 경청재 등으로 조성이 되어 있다. 경청재는 1900년대 이후에는 머슴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경청재를 지을 때, 순과 준 두 후손은 이언적에게 후손들이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해 화의문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 선조고(先祖考)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의 별서이고 이외 유택에는 우리 부모(휘 전인, 호 잠계)의 혈성이 가득하다.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써 논단할 것이다.

 

흙 담이 자연과 순응하고

 

독락당을 돌면서 가장 편하게 보이는 것은 흙담과 흙길이다. 기와와 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고 쌓아올린 흙담은 투박하다. 그러나 그 흙담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 독락당이 더 편한 집이란 생각이다. 거기다가 담과 담 사이에 난 흙길 또한 백미다. 독락당은 전체적인 집의 구조물을 감싼 담장 안에 또 다른 담장들이 건물을 가르고 있다. 어찌 보면 한 채 한 채가 다 별개의 집으로 조형이 된 듯하다. 집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장 편안하게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독락당을 지은 이언적은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것을 알게 된다. 한 마디로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해 집을 지었다. 독락당을 돌아보면 집의 우측에 계곡이 있다. 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난 담장에, 흙 담이 아닌 나무로 만든 창이 있다.

 

말은 창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창살도 나무로 만든 이 담 벽에 붙은 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시원한 계곡의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독락당의 건축미학이 이런 곳에 있다. 계곡의 바람도 들어오고, 이 담 벽의 창으로 계곡의 경치까지 볼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 아닐는지.

 

 

담 벽에 붙여 지은 건물의 용도는?

 

계곡을 돌다가 보면 또 하나 볼거리가 있다. 담의 한쪽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반은 밖으로 반은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의 용도는 무엇일까? 곁으로 지나가다가 보니 이 건물의 용도가 궁금하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뒷간의 용도가 아닌가 한다. 담의 밖으로 돌출을 시켜 안의 공간을 확보하도록 한 이런 여유가 독락당의 또 하나의 묘미다.

 

 

 

넌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곳에 있느냐?

 

흙으로 올린 담장 사이로 난 길을 걸어 계곡 쪽으로 가다가 보면, 담장 끝에 난 조그마한 문 하나가 있다. 이 작은 문을 왜 이곳에 두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이 문의 용도는 계곡으로 드나드는 문이란 생각이다. 즉 이 작은 문을 나서면 바로 계곡이다. 여름철 더위를 씻어내고 싶을 때, 이 담벼락에 붙은 쪽문을 나서 계곡에서 목욕이라도 했던 것일까?

 

 

이 문이 아니면 담장을 돌아 나와야 한다. 이 작은 문 하나가 계곡을 가기 위한 것이라면, 이 집주인의 작은 배려 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 독락당은 자연이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렸다. 독락당의 매력은 바로 그런 점이다.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곳, 그 안에 또 다른 독락당이 있었다.

 

 

 

 

 

 

 

 

 

 

 

 

 

몸은 늙어가고, 답사는 끝이 안보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상상 외의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가끔은 그런 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당황한다. 한 마디로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경주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 옆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면,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산은 선도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마을 끝에서 우측 길로 보면 고분이 몇 기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삼층석탑이 보이는데,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주사위 모양의 돌로 쌓은 기단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한 보물 제65호 서악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일반적인 형태의 탑과는 다르게 모전석탑형이다. 밑에 있는 바닥 돌 위에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만든 커다란 돌 8개를 이층으로 엇갈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어놓았다.

 

서악리 삼층석탑의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는 1층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그 위에는 3단의 몸체를 쌓았는데, 1층 몸돌 남쪽 문틀 양편에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인왕상은 그 동안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올린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기단에 비해 몸돌이 갑자기 작아져 있는 형태이다. 석탑의 부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퇴화하는 석탑

 

높이 5.07m, 기단 폭이 2.34m인 서악리 삼층석탑은 돌을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의 형태로, 이런 유형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교적 투박하게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탑으로, 색다른 느낌을 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제대로 공부도 못했는데, 몸은 늙어가

 

그동안 매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벌써 20년 넘는 세월을 답사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는 이제 겨우 20%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아직 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가고 싶은 곳들도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늘 탓하고 살아야만 한다.

 

 

 

오늘 서악산 삼층석탑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 부러운 것이 아니다. 천년 세월, 그렇게 변함없이 서 있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사람도 저렇게 버틸 수만 있다면, 좀 더 여유를 갖고 답사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 말이다.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묘. 현재는 사적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 어느 왕릉보다도 화려하게 조성이 된 김유신묘는 석물과 무덤을 두르고 있는 십이지신상들로 인해 유명하다. 묘의 입구에 서 있는 문은 <흥무문>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왕의 격식을 갖춘 묘

 

김유신의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비에 숨은 비밀, 왜 그랬을까?

 

이 비와 마주보고 서 있는 또 하나의 비. 그 비는 1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에는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비의 맨 아래글자인 능(陵)자가 물에 젖으면 묘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왕으로 추증을 받아 흥무대왕이란 호칭을 받았지만, 김해 김씨들이 관리를 하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유신묘를 찾아간 날은 날씨가 좋아 <묘>자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관리인인 듯 한 분에게 물을 부어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대답이다. 삼국을 통일하고, 왕으로까지 추증을 받은 김유신.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시시비비를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천년이나 지난 세월에, 굳이 그렇게 임금이 아니었음을 강조를 했어야 했을까?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또 다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참 우리네 인간이란 것들은 참 묘하다. 왜 굳이 그런 일을 벌어야했는지, 하기에 사람은 살아생전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라고 성현들이 말씀하셨나 보다. 오늘 이 묘비 하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사연도 참 많다. 이런 저런 사연을 듣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그만큼 재미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이다. 왜 힘든 문화재 답사를 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답사의 재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주에 있는 보물 제121호인 굴불사지 사면석불. 극락정토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보인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땅을 파보니 사면에 석불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가 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사>라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절터로 추정

 

최근에 들어 이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으며, 출토유물 가운데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현재 백률사라는 절이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지나 있는데, 이 절은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라고 전한다.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높이 3.5m 정도의 커다란 암벽 사방에 부처와 보살상을 조각한 사방불이다. 흔하지 않은 사방불이라 그 가치도 높지만 사방에 새겨진 불상의 조각이 뛰어나다. 사면석불은 산을 향해 올라가면서 정면으로 보이는 서면은 아미타삼존불, 동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면에는 삼존입상, 북면에는 보살상이 돋을새김이 되어있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중 아미타삼존불

 

뛰어난 조각이 돋보이는 사면석불

 

사방불을 조성할 때는 남방에 석가모니불을 위시하여 북방에는 미륵불, 동방에 약사여래, 서방에 아미타불을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굴불사지 사면석불도 서방에는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했다.

 

아미타삼존불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몸체는 돋을새김을 하여 놓았다. 머리는 따로 조성을 하여 몸체에 올려놓은 형태이다. 아미타불의 죄우에 모신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따로 조각을 하여 좌우에 모셔놓았다. 대세지보살의 경우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가 알아볼 수가 없다

 

11면의 관음보살, 마모가 심해

 

아미타삼존불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돌면 북면에 돋을 새김한 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크게 들어 올린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돋을새김을 한 보살상의 옆으로는 희미하게 음각을 한 선이 보인다. 분명하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11면의 얼굴과 6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 알아볼 수는 없고, 형체는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 암석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불상을 새겨 넣음으로써 극락정토를 그리며 살았을 것만 같다.

 

위 사진은 북면 보살상으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북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이며, 아래사진은 굴불사지 사면석불의 동면에 돋을새김한 약사여래상 이다

 

돔면을 상징하는 곳에는 약사여래좌상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머리는 크고 높은 육계로 표현을 했다. 상반신에는 희미하게 법의가 음각을 한 선으로 표현이 되어있으나, 이 또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희미하다.

 

훼손이 된 부조, 정말 아쉽고 또 아쉽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으나 오른손은 파손이 되어있다. 사면석불 중 그 어느 것보다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아마 석불의 뒤편에 조성이 되어있어 상대적으로 자연적인 훼손을 막은 듯하다.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에 돋을새김한 보살상. 좌측은 아예 떼어낸 듯 사라졌다.

 

남면의 보살입상을 보면 좌측이 무엇인가 떼어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원래는 세 분의 보살입상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돋을새김한 두 분의 보살 중 한분은 머리가 사라진 상태다. 남면의 보살입상은 신체의 비례가 적합하고 조각수법도 빼어나다. 둥근 연꽃대좌를 만들어 발밑을 받치고 있으며, 배 모양의 신광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다양한 무늬들이 새겨져 있다.

 

해가 따갑다. 하루에 몇 군데를 돌기위해서는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보면 흐르는 땀조차 주체를 못한다. 물 한 병은 1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물병을 수두룩하게 짊어지고 다닐 수도 없는 답사 길이다. 그러다가보니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만나는 석불에게도 속으로 기원을 한다. 즐겁고 평안한 답사 길이 되게 해달라고. 그리고 또 하나 흉측하게 변해버린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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