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오겠다는 지인들, 어디가 좋은지 물어와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옛 경수간 국도를 따라 펼쳐진 5km의 도로변에 식재된 소나무들을 말한다. 정조대왕이 내탕금 1,000량을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주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이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의 융릉)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것으로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는 길이다.

 

수원시는 그동안 노송지대 곳곳에 들어서 있던 건물을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다. 20165월엔 노송 지대를 통과하는 도로를 폐쇄했으며, 우회도로를 개설하고 노송공원 일대(2734)에 소나무 33주를 심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노송 지대 주변 토지를 사들여 도로포장을 걷어내고 녹지를 조성했으며, 이곳에 노송공원을 조성했다.

 

하지만 정조대왕 당시에 효심으로 심은 소나무들은 대개 고사하고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소나무 중에서 현재는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 삼풍가든(노송지대 소나무 군락) 부근에 21,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가을에 걸어보는 노송지대에서 새 기운을 느끼다

 

24일 오후 전화를 한통 받았다. 충청도 일원에 거주하는 지인들이 주말경에 수원을 찾아오는데, 수원에 갈만한 곳을 소개해 달라는 전화였다. 그동안 몇 차례인가 수원을 올 때마다 화성을 한 바퀴 돌고는 했는데, 화성 외에 가을을 만끽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문화가행을 하는 일행이라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노송지대와 만석공원 일대를 돌아보면 적당하겠다고 생각든다.

 

25일 오전 7시에 길을 나서 송정초등학교 앞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송정초등학교 주변 도로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를 돌아보고 난 뒤 걸어서 2.5Km 정도. 경기도문화재자료인 노송지대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천천히 걸어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소나무 아래로는 맥문동이 가득하다.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들여 조성했다는 소나무길. 220년이 흐른 지금은 그 일부가 남아있지만 이 길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길이다. 능행차를 마치고 돌아가던 정조대왕은 지지대고개에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의왕시와 경계 마루턱에 놓인 지지대비는 그런 정조대왕의 효심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가을날 걸어보는 노송지대는 여름과는 또 다르다. 그저 더위를 피해 걷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면서 정조대왕의 효심과, 내탕금을 내주어 소나무길을 조성한 대왕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누군가 소나무 숲길에 재활용품을 가득 쌓아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길에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수원미술전시관과 만석공원도 돌아봐

 

이곳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노송지대 길에 남아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번호표를 붙이고 있기 때문에 초행길이라고 해도 누구나 220여 년 전에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주어 심은 소나무라는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사전에 미리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수원을 찾아오는 일행들에게 정조대왕의 효심과 소나무, 그리고 가을이 물들어가는 만석공원 일대를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송지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 만석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송정초등학교 인근에 자라고 있는 정조대왕 당시 식재한 소나무들과 수원시 향토유적인 만석거, 만석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만석공원, 영화정, 수원미술전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침 시간 건강을 위해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걷는다.

 

만석거 주변으로 난 산책길을 걸으며 공원에 가을이 물든 나무들을 바라본다. 이 가을에 어딜 가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하지만 수원 화성을 돌아보지 않고 역사와 문화, 볼거리와 즐길거리, 그리고 먹거리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본다면 난 이 길을 추천하고 싶다.

 

이 가을. 노송지대를 걸으면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만석공원에 들려 수원미술전시관에 전시된 작품들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주말이면 운 좋게 만석공원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연까지 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다.

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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