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위로부터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도착함을 알리는 파발.왕의 행행시에 나열되는 깃발, 말을 타고 맨 앞에서는 경기감사

 

능행차반차도의 재현

 

324()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위로부터 훈련대장, 백마를 탄 정조대왕, 행행에는 상궁과 나인들도 함께 한다 

 

1795년 음력 윤 2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24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4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위로부터 혜경궁홍씨의 가마, 행궁으로 향하는 전조대왕 행차, 행궁 앞에 이른 정조대왕을 맞이하는 장용외영의 무사들

 

많은 인원이 생략되기는 하였지만, 반차도의 순서대로 행행이 이루어졌다. 길가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꺼내 어가행렬을 찍기에 바쁘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 앞에 도착하자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먼저 정조대왕을 맞이하고, 뒤이어 유수가 정조대왕을 안내해 행궁으로 거동을 한다.

 

격쟁으로 백성을 사랑한 정조대왕

 

격쟁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의 행행 중에 징을 치고 나아가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이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위로부터 억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고하는 격쟁, 신풍루를 통과하는 고취대, 신풍루를 들어서는 정조대왕  


격쟁을 마친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고취대를 앞세우고 도착을 하자, 화성 행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신풍루의 솟을삼문 중 중앙문을 통해 정조대왕이 입궁을 했다. 비록 적은 인원에 짧은 거리였지만, 정조의 어가행렬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수원만이 갖고 있는 자랑거리인 정조대왕의 능행차. 수원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이 시대의 문화콘텐츠가 아닐는지.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