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과 어린이들 모두 하나가 되어 활 시위를 당긴다. 활을 떠난 화살이 30m 앞에 놓인 곰두리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른다. 누구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 것인지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쏜 화살이 맞았다고 즐거워 한다. 

11월 27일 오후. 수원에 소재한 사적이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동장대인 연무대 앞에는 국궁체험장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국궁체험을 즐기기 위해서이가. 하절기에는 오후 5시 30분까지, 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까지 활을 쏜다. 30분에 한 번씩 사대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게 국궁체험을 하는 것이다.





각궁은 고려 때부터 사용

우리가 일반적으로 국궁이라 부르는 각궁은, 삼국시대의 맥궁에서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활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각궁이 언제부터 널리 보급되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함흥 선원전에 보면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각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각궁을 사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각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전통적인 활인 각궁은 참나무, 산뽕나무, 물소뿔과 소의 힘줄, 대나무 등을 이용하여 만든 복합단궁의 형태이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10여 종 이상의 활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각궁 한 종류 뿐이다. 하기에 우리가 국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각궁을 일컫는 말이다.




안내를 따라 쏘아보는 국궁

사대에 오른 체험을 하는 관광객들은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선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라 활과 화살을 들고 과녁을 향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간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국궁체험은 사용료가 10발에 2,000원이며 두 번을 쏠 수 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다. 설명을 듣고도 따라하기가 힘든가 보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김아무개(남, 42세. 서을)는 10발을 다 쏘고 난 후





"정말 뜻 깊은 체험입니다. 이렇게 화성 안에서 활을 쏘니 정조대왕 때 장용위 군사라도 된 기분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홍보를 많이 해야겠네요" 라고 한다.

부모님들과 함께 왔다는 양모군(남, 11세. 초등학생)은

"정말 재미있어요. 우리 활을 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라고 하면서 즐거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화성의 국궁체험.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국궁체험장으로 몰려들 것이란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성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궁체험을 할 수 있도록 통역관을 배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옹기는 언제부터 우리가 사용을 했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誌 魏志 東夷傳)』 고구려조에 보면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부경(浮京)이라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여 저장을 잘하며, 발효된 음식을 먹기를 즐겨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제31대 신문왕조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왕비의 집에 보내는 예물품목이 쌀, 술, 기름, 간장, 포와 젓갈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 저장구인 옹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수옹도기라는 단어가 나오며, 규모가 높이 6자 너비 4자 5치, 용량이 3섬 2되가 든다고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는 이미 옹기를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조선옹기 특별전시장>의 간판과 옹기를 둘러보는 사람들

서민들과 함께 한 옹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많은 기록에서 옹기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 세 곳에서 황옹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국대전』공정 외공장조에 보면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이 한 사람이 있으며, 공전 경공장조에는 본조 봉상시 등 14개 기관에 옹장이 104명에 각각 뒷일꾼 2명씩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진 옹기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많은 종류의 옹기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서민 생활에서 꼭 필요한 그릇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건너편으로 30m 정도를 이목대 쪽으로 가면 팔도 옹기전을 열고 있다. 여기저기 널린 다양한 옹기들을 관람 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매매도 이루어진다. 팔도옹기전에 보이는 옹기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옹기들을 둘러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기들


'술독'이다. 술을 빚은 날짜와 몇번 째 슬독인지, 누가 담구었는지를 적게 되어있다. 높이는 5자 정도이며 길고 위가 불룩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맨위는 '청수단지'다. 청수단지란 이른 아침에 주부들이 깨끗한 물을 길어 부어놓고,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 때 사용을 하는 옹기이다. 가운데 것은 '좀도리'라고 하는 옹기이다. 좀도리란 매일 밥을 할 때마다 조금씩 쌀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옹기항아리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볼 수 있는 그릇이다. 아래 항아리는 '물두멍'으로 물을 많이 담아주기 위한 항아리다. 물두멍은 키는 낮고 배가 불룩하며 주둥이가 넓어 편하게 물을 퍼담을 수 있다.




위에 것은 '시루'라고 부른다. 흔히 떡을 찔 때 사용하는 것이다. 가운데는 '자배기'라고 하며 물건을 담아두거나 물을 담아 두기도 한다. 장독을 덮을 때도 사용을 했으며, 집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옹기 중 하나이다. 맨 아랫 것은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높이는 85cm, 둘레는 295cm로 곡식, 물, 김치 등을 담아둔다.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배둘레가 크고 키가 작아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맨 위에 것은 '간장통'이다. 중간에 꼭지가 있어 간장을 따르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가운데는 '소줏고리'라고 부른다. 좌측은 경상도 소줏고리이며 우측은 전라도 소줏고리이다. 소줏고리는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용기이다. 아랫것은 조선조 말에 만들어진 '똥 항아리'이다. 높이는 135cm, 둘레는 395cm이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똥통으로 땅에 묻어 사용을 했다.




위에 것은 '앵병'이라 부르는 옹기이다. 짠지를 담아두기도 하고 청주나 막걸리를 담아 두기도 한다. 가운데는 '씨앗항아리'다. 각종 씨앗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을 했다. 맨 아래는 '장군'이라 부르며, 누여 사용하고 보관은 세워둔다. 어떤 액체를 담느냐에 따라서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으로 부른다.


이 옹기는 '귀때단지'라고 부르는 물을 담는 용기이다. 둘레의 한편에 주둥이가 달려 물을 따르는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부터 민초들이 즐겨 사용하던 옹기.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여 음식을 담아 놓으면 오래도록 상하지가 않는다고 한다. 선조들이 어떤 그릇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그래서 재미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