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이 글을 쓴 세월이. 그리고 오늘 20년 만에 우연히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는 글 두편을 찾았다.

 

살풀이

 

덩실덩실 풀어간다

이승에서 맺힌 고를

한 겹 한 겹 풀어간다

 

누구라 맺힌 마음

저리도 슬피 울어

찢어진 가슴 한 귀퉁이

바람에 휘날릴까

 

그저

목 놓아 울어본들

가시는 길이 북망이고

잠든 곳이 산천이라

 

풀어헤친 봉두남발

다소곳 갈기 모아

흰 천 손에 들고

플어내니 겁살(劫煞)이라

 

 

()랄 것도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끼적였을 뿐이다. 내가 시인도 아닌데 무슨 시를 쓸 것인가? 우리 춤인 살풀이 사진을 찍어대다가, 옆에 놓인 종이에 적은 글이다. 그리고 당시 플래닛이라는 나만의 공간을 올려놓았었다. 아침에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살풀이라는 글을 찾았다. 1994년인가 적은 글이니 꼭 20년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인터넷에 이 글이 남아있다.

 

물론 내 블로그는 아니다. 아마도 누군가 이글을 퍼다 자신의 블로그에 남겨 두었는데, 그 글이 내 눈에 띠였을 뿐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내친 김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또 하나의 살풀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보인다. 참 글 같지도 않은 글을 만났으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살풀이 2

 

먼 산 한번 쳐다보고

물동이에 올랐다.

무거운 다리는 천근이고

하늘은 그다지도 높았는지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그 끝이 없다.

천겁 세월 찌들어 온 인생

그 안에 먼 살()이 그리도 많았는지

날마다 살을 풀어낸다 야단이다.

어미 아비 세상을 뜨던 날

살 풀어 저승원문 편히 가라고

그렇게 물동이 타고 훨훨 날았다.

 

 

26일 지동 시인의 벽을 취재하고 난 후, 기사를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발견을 한 두 편의 글. 참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찾아놓고 괜히 부끄러워진다. ? 이런 글을 적었을까? 살풀이는 우리 춤 살풀이를 보고 썼고, 살풀이2는 굿판에서 무당이 물동이에 올라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생전 시라는 것은 써보지도 않았고, 시를 쓰는 법을 배운 적도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 편의 글이 아직도 인터넷에서 검색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참 아무 것도 모르는 인사가 끼적인 글도, 글이라고 나돌고 있으니 말이다.

요즈음은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간에, 사람들마다 휴대폰을 지참하고 다닌다. 휴대폰의 기능도 날이 갈수록 발전을 해, 작금에 들어서는 컴퓨터가 갖고 있는 기능을 거의 다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고집스럽게 구형 핸드폰을 고집하기도 한다, 전화와 문자만을 이용할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내가 휴대폰을 바꾼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취재생활을 하다가 보면, 수시로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이기 때문에 전화가 없으면 생활하기가 수월치가 않다. 또한 여기저기서 보도자료 등이 수도 없이 날아오기 때문에, 전화가 없는 생활이라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휴대폰을 이용하는 방법은 다 다르다. 누구는 게임을 즐겨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게임이나 영화를 보는 것은,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렇다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데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는데 있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블로그와 신문 열람에 이용해

 

내가 주로 휴대폰을 이용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휴대폰을 처음 받을 때 기존의 프로그램 말고, 몇 개의 창이 화면에 보인다. 오마이뉴스, e수원뉴스 등의 신문과 페이스 북의 창이다. 그리고 늘 열어보는 다음 뷰의 창이 하나 더 있다. 언제 어디서나 이 휴대폰을 이용해 접속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나 e수원뉴스의 창은 주로 기사를 읽는데 이용한다. 그렇다고 휴대폰에서 바로 기사를 쓸 수는 없다. 사진을 정리해야 하고, 짧은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등을 휴대폰을 이용해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휴대폰이 주는 편리함이란 대단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바로 다음 뷰의 창이다. 다음 뷰에는 수시로 올라오는 글들이 많다. 설정을 해 놓으면 내가 구독하는 블친들의 글이 다 나타난다. 거기서 추천을 누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특성상 상호간에 서로 추천을 눌러주는 것은, 예의처럼 되어있다. 꼼꼼히 시간마다 확인을 해 추천을 누르고는 한다.

 

실시간으로 이용하는 페이스북

 

요즈음 들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은 바로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SNS(소셜네트웍서비스)의 강자라고 한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후, 그것에 바로 설명을 적어 페이스북에 올린다. 실시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바로 사람들에게 알릴 수가 있다.

 

 

휴대폰의 사진 찍기 기능에 좋아졌기 때문에, 언제라도 좋은 화질로 페친들에게 소식을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컴퓨터를 아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세심하게 사진이 필요하거나, 많은 양을 글을 쓸 때에는 당연히 컴퓨터에서 작업을 한다. 현장소식을 휴대폰으로 올릴 수 있는 사진이나 글을 오래도록 작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많은 소식들. 바로 휴대폰이 갖고 있는 편리한 기능이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현재 활동을 하고 있는 작업에서는, 이것으로 만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세상을 반은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늘 이런 생각을 한다.

 

 

5월 한 달 여기저기서 많은 행사가 열린다. 그것을 현장에서 바로 페이스북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나에게 휴대폰은 언제나 함께하는 믿음직한 동반자이다. 24시간 휴대폰을 곁에 두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끔은 뒤를 돌아다 봅니다. 그저 내가 지난 날을 어떻게 살아왔나? 그리고 남은 시간은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15일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번의 행사를 치루고나니, 거의 추주검 상태로 변했다는 것이죠.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이제 점점 기운이 떨어져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죠.

사람은 가끔은 지난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나는 어떻게 찾아볼 수 있을까가 궁금해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서 나를 찾아보았습니다. 지금 다음뷰나 오마이뉴스에 보이는 나란 인간 말고, 또 어떤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나이 20대에 작곡을 시작하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1970년에 <동아음악콩클 작곡부분>에 입상을 하면서 동아일보에 보도가 된 자료입니다. 벌써 40년이 지난 나를 인터넷에서 발견을 한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여러 해 작곡에 몰입하면서 여기저기 이름이 보이고 있습니다. 1979년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 1982년 인천시립무용단 창단공연 등의 자료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위 신문은 1970년 동아일보입니다. 나눔 단 아래 첫 번째 신문은 동아일보 1979년 5월 신문으로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작곡을 맡아했을 때, 두번 째는 1981년 제3회 대한민국 무용제 때 기사입니다. 그리고 밑은 1982년 인천시립무용단 창단공연인 '굴레야'를 작곡했을 때 신문기사입니다.
 
그동안 관현악, 중주곡, 무용음악 등 한 30여곡은 작곡을 한 듯합니다. 그 때의 악보는 하나도 갖고있지 못해 아쉽지만, 국립국악원 자료실과 문예진흥원 자료실에 자료가 남아있다고 하네요.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작곡가 사전이라는 책이 1999년에 발간이 되었는데, 그 책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1985년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 그 동안 저서 20여권

아마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쓴 것은 일년에 4권인가를 썼습니다. 일년 동안 답사를 마치고 나면, 책상앞에 앉아 글만 쓴 것이죠. 1985년인가 이천에서 처음으로 '거북놀이'라는 책을 쓰고나서,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 용인의 내고장 민속, 대전의 한밭의 옛노래 등 지역의 전통문화와 민속, 무속 등에 대한 책을 열심을 내어 썼죠


그동안 쓴 책들이 20여권이 되는데, 일부만 몇 권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거의 품절이 되어서 도서관에서나 만나볼 수가 있다고 하네요.

책을 쓴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더욱 지역의 책을 한 권 쓰기 위헤서는 제가 다루는 부분의 특성상, 지역 전체를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현장에서 채록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만큼 노력을 필요로 하죠. 

마을마다 다니면서 어르신들께 일일이 부탁을 드리고 가사를 녹취하고, 악보까지 곁들이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보아야 한 두곳이 고작이죠. 그렇게 만들어낸 발로 쓴 책들입니다.
 

네이버에서 책 한권을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품절이 되어서 이제는 구할 수조차 없는 책이 되어버렸네요.

 

위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책의 목록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책입니다.

살다가 보면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가가 정말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지쳐 자리에 들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 시간의 흔적을 보고 싶어 찾아낸 내용들입니다. 참으로 숨 가쁘게 살아온 세월이었네요. 별로 편안하게 쉬어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바쁜 걸음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제 문화재에 대한 열망으로 당연히 또 그런 세월을 살아야 할테죠.

'그것이 사람사는 것 아닌가요?'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도로변에 자리한 괴헌 고택.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설 연휴 전인 1월 29일에 찾아간 괴헌 고택. 구제역으로 인해 영주의 여기저기 도로가 막혀있다. 특히 이산면 방향은 축산농가가 많아서 그런지 중간 중간 도로를 폐쇄한 곳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괴헌 고택까지는 도로폐쇄가 되지는 않았다.

영주 괴헌 고택은 연안 김씨 영주 입향조인 김세형의 8세손인 덕산공 김경집(1715~1794)이 정조 3년인 1779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은 낮은 비탈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넓은 평지가 조성되었다. 괴헌 고택은 외풍을 막아주고, 바람이 불면 낙엽을 쓸어 모아 준다는 ‘소쿠리형’, ‘삼태기형’의 명당 터라는 것이다. 김경집은 아들 김영(1789~1868)이 분가할 때 이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구분

읍면동

개소수

시작지점

폐쇄일자

폐 쇄

설치물

종 류

노선번호

합계

2개

읍면동

7개소

 

 

 

1

이산면

(5개소)

이산면 지동1리덧재

2010.12.08

모래

리도207호

2

이산면 지동3리장수골

2010.12.12

모래

리도202호

3

이산면 신암1리배진기

2010.12.18

 

 

4

이산면 신암2리우금

2011.01.02

 

5

이산면 원리 솔고개

2011.02.06

나무

 

6

봉현면

(2개소)

봉현면 하촌1리한티재

2010.12.06

경운기

리도207호

7

봉현면 하촌3리 제방

2010.12.13

경운기

하천제방

답사 당일 영주시에 통행이 제한 된 마을들. 굵은 글씨는 답사시 막혔던 곳이다. 이산면에 집중적으로 길이 막혀있다




회화나무가 많아 당호를 ‘괴헌’으로 짓다

김영은 이 집에 ‘괴헌’이란 당호를 붙였다. 그것은 집 주위에 회화나무가 많아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괴헌 고택은 고종 8년인 1871년 선생의 증손인 김복연이 일부를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가옥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 형으로 집이 구성되어 있다. 뒤편에는 동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한다.

괴헌 고택의 특징은 사랑마당과 안마당, 그리고 사당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사랑채 우측에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수납공간과 쪽마루, 그리고 고방 등을 여기저기 펼쳐놓아 집안에 많은 기물들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원래 정침의 앞에는 ‘월은정’이라는 정자와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1972년 수해시에 유실이 되었다고 한다.



날아갈 듯한 사랑채의 처마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막돌로 쌓은 축대위에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모두 세 칸으로 지었으며, 동편 한 칸은 마루방으로 꾸몄다. 문간채는 바깥담을 판자벽으로 둘러놓아, 전체적인 집안 분위기를 대문간부터 부드럽게 했다. 사랑채는 툇마루 앞에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툇마루는 사랑 동편까지 이어진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사랑채는 집 전체가 날아갈 듯하다. 그만큼 사랑채를 꾸미는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중문이 나 있다. 중문 위에는 ‘괴헌고택’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으로는 사랑에 불을 때는 아궁이와 고방을 마련했다. 중문 앞에 쌓여있는 장작더미가 정겹다.

중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광채가 자리하고, 맞은편에 안채가 조금 높게 막돌로 쌓은 축대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안채는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공간을 이용하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으로는 쪽마루를 놓고 바람벽으로 막았다. 이 쪽마루를 이용해 중문을 통하지 않고도 바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쪽마루의 출입처는 사랑채 동편에 붙은 날개채에도 나 있다. 괴헌 고택에는 안방에 피난다락과 사랑방의 뒷벽에 은신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쪽마루가 그런 대피수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리 안되는 문화재청 자료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대개는 그 지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문화관광 편을 찾아보거나, 문화재청의 문화재 설명을 참고한다. 그런데 괴헌 고택의 자료를 찾다가 보니, 영주시청 홈페이지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나와 있다. 2009년 10월 30일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괴헌 고택이 중요민속자료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 두 곳에 소개가 되어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5호였다가, 2009년 10월 30일자로 중요민속자료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2년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승급이 된 괴헌 고택이, 문화재청 자료에는 아직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소개가 된 것이 남아있어 혼란을 야기한다.


위는 괴헌고택이 경북 문화재자료라고 남아있는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창, 아래는 영주시 문화관광 창

우리의 문화재를 총괄하고 있는 문화재청에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것인지. 이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가 안되는 문화재청에서, 과연 우리 문화재를 올바로 관리를 할 수가 있을는지. 그저 문화재를 사랑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으로서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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