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수원 화성문화제가 10월 4일 오후 8시부터 방화수류정 성 밖 용연에서 전야제인 ‘용연지몽1’을 시작으로, 5일부터 7일까지 화성행궁과 화성 화홍문, 방화수류정, 수원천 일대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번 화성문화제에서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에 대한 꿈으로 축성된 화성에서, 정조대왕의 품었던 그 꿈을 아로새기고자 마련했다.

 

‘화성, 꿈을 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제49회 수원 화성문화제는, 10월 5일에는 화령전에서 열리는 ‘작헌의‘와 ’정조대왕 능행차‘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10월 6일에는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의 모습을 봉수당에서 볼 수가 있다. 셋째 날인 10월 7일에는 봉수당에서 열리는 ’혜경궁홍씨 진찬연‘의 모습이 재현 될 예정이다.

 

 

 

축제에 모인 분들에게 수원천을 권하고 싶다

 

3일 동안 열리는 화성문화제에는 외지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온다. 수원을 찾은 그 분들께 꼭 한 곳을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주변에는 이런 저런 것들을 볼 것들이 많지만, 이왕 이곳에 왔으면 이것만은 꼭 한 번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에 꼭 하나 고집하는 것이 있다. 가급적이면 문화재 앞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지 말고, 조금쯤은 걸어서 가라고 권유한다. 조금 땀을 흘리고 난 뒤 만나게 되는 문화재, 그래야 조금 더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수문에서부터 수원천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갖가지 생태 체험을 할 수가 있다. 우선은 천변 양편으로 난 길이 풀로 뒤덮여 있다. 천천히 물소리를 따라 걷다가 보면,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그 뒤로는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을 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다.

 

새로 조성중인 다리 밑 벽화

 

조금 올라가다보면 매향교 밑을 지나게 된다. 아직은 완성되지가 않았지만, 이 다리 밑에는 벽화작업이 한창이다. 수원청개구리의 일화도 만날 수가 있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손짓을 한다. 매향교 옆에는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재미를 쏠쏠하게 느낄 수가 있다.

 

 

 

조금 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옛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줄 수도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건너보는 징검다리. 아마도 50여 년 전쯤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아닐까? 북수문인 화홍문에 도착하기 전에 물오리 등도 만나게 되는데, 운이 좋으면 재두루미 부부와 만날 수도 있다.

 

‘방화수류정’, 이름만으로도 아름답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쫒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10월 5일부터 3일간 막을 올리는 제49회 수원화성문화제. 구경도 좋지만 아이들과 함께 수원천 길을 걸어 방화수류정에 올라보자. 또 다른 즐거움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수원 행궁 - 화서문 뒷골목에서 만난 이야기들

 

뒷골목을 걷다가 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우중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뒷골목에는 의외로 이야기꺼리들이 숨어 있다. 요즈음 수원의 뒷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에 푹 빠진 것도, 그런 재미를 붙여서이다. 그리고 그 뒷골목에서 만나는 음식 한 가지 정도나,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나 덤으로 붙어 온다면 그야말로 재수있는 날이란 생각이다.

 

어제 줄기차게 퍼붓던 비가 밤늦은 시간에 그쳤다. 오늘은 모처럼 아침부터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이런 날이면 좀이 쑤셔 붙어있을 수가 없다. 수첩과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뒷골목을 찾아 나섰다. 화성 행궁 앞에서부터 화서문까지 가는 골목길은 고작 700m 정도이다. 그 안에는 어떤 모습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장님 하늘에서 우리학교를 지켜주세요‘

 

행궁 앞을 벗어나 화서문 쪽으로 길을 시작하면 신풍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그 앞으로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쁘다. 해바라기와 수세미, 호박 등이 달려있는 커다란 화단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잘 가꾼 텃밭이 있다. 신풍초등학교는 수원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이다. 그런데 그 담장에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 신풍초교 동문이신 고 심재덕 시장님, 116년 역사 이 학교 하늘에서 꼭 지켜주세요’

 

이런 문구가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116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신풍초등학교가 2013년까지 광교신도시로 옮겨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풍초등학교는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학교다. 1896년 수원군 공림소학교로 개교하여, 일제 수난기와 6·25사변을 거치면서 도내에서는 최초로 초등교육의 뿌리를 내린 터다.

 

 

 

수원교육청 앞에는 심심찮게 신풍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 학교자리는 원래 화성행궁이 서 있던 곳이다. 행궁 복원을 시작할 때부터 이전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학부모와 선생님들, 그리고 동문들까지 이전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 행궁의 복원도 생각해보아야 할 국책사업이다. 서로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야기꺼리는 찾아보면 되는 것이지

 

짠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몇 발자국만 걸으면, 외형상으로는 지저분한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수원시에서 매입을 하여 부수려던 건물 하나를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준 곳이다. 레시던시 입주작가들은 나름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 건물 벽에는 작은 그림 도판들이 빼꼭 들어차 있다. 그것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좌측으로 난 차도를 따라 걸으면 화령전 솟을 문이 나온다.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이다.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화령전 앞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마도 신풍초등학교 아이들인 듯하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모여서 번호를 따라 외발로 뛰는 놀이가 재미있다. 그런 놀이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걷다가 보니 전봇대를 타고 오르는 넝쿨이며, 대문 앞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들이 보인다. 그 또한 길을 걷는데 감초역할을 한다.

 

고추 화분이 놓인 집 대문간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있다. ‘주의 소독함‘, 얼마나 지나가면서 고추들을 따가기에 이런 푯말가지 붙여 놓았을까? 남의 고추를 말도 않고 따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길 끝에서 만난 초가집, 선술집이 따로 없네.

 

길 끝에 화성이 보인다. 꺾인 길을 돌아서니 그 끝에 초가집 한 채가 보인다. 주인장의 말로는 한 30여년 정도 된 집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을 판다. 그야말로 화서문과 어우러진 선술집처럼 느껴진다. 낮 시간이라 술을 한 잔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붙어있는 가격표가 재미있다.

 

뒷골목, 난 왜 침침한 뒷골목이 좋은지 모르겠다. 혼날 말이지만 뒷골목은 낙후된 곳일수록 정겹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보다. 그 뒷골목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역시 난 뿌리부터가 서민인 듯하다. 하기야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거들먹거려보았자. 땅 속에 들어가면 한 줌 흙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광교산 산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택하라고 한다면, 난 당연히 2.4km 구간인 ‘수변산책로’를 꼽는다. 광교쉼터에서 다리를 건너 시작하는 수변 산책로는,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도 그리 힘들지가 않다. 우선 거리가 2.4km 정도지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변하는 주변경치를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도심의 답답함이 싫어질 때면 이 길을 걷는다. 그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도 40분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길을 걸을 때 가장 즐기는 방법이, 아주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걷는 법을 택한다. 무슨 전쟁에라도 나갔는지 황급히 곁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안 걷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좋은 길

 

 

 

광교저수지를 끼고 걷는 수변산책로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좋은 길이다. 또한 계절마다 그 느끼는 감흥이 달라진다. 여름철에는 신록이 우거져, 오후 4시만 되도 숲길은 햇볕이 사라져버린다. 가을이 되면 저수지에 모인 물에도 단풍이 드는 그런 길이다. 내가 이 수변산책로를 적극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금 걷다가보면 오른편으로 돌무지 하나가 보인다. 옛날 같으면 서낭당이라고 하겠지만, 주변 정리를 하면서 쌓아올린 누석총인 듯하다. 저런 것 하나가 길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저 어느 소리꾼이 소리를 하고 지나는 길과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수시로 바뀌는 길의 모양도 새롭다


산에 있어야 할 바위가 길로 나왔다. 아마도 함께 걷고 싶은가 보다. 바위도 나무도 그리고 온갖 새들도 함께 걷는 길이다. 그래서 수변산책로는 지루하지가 않다. 그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좋은 길이다. 잠시 사파른 길이 나오는가 싶으면, 다시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저만큼 어머니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지나쳐 간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환하다. 길이 아름다워서일까?

 

 

 


잠시 광교저수지를 볼 수 있는 시야가 트인다. 7월 29일 오후의 햇살을 받은 저수지의 물이 아름답다. 한 쪽에는 푸른 녹조가 끼기도 했지만, 날이 워낙 더위니 어쩔 것인가? 그저 그러려니 하고 걷는다. 가다가보면 몇 개의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쉴만한 의자도 놓여 있다. 바쁠 것이 없으니 앉았다 가라는 뜻일게다.

 

열심히 수변산책로를 걷는 두 모녀인 듯한 사람들이 지나간다. 부부인 듯한 사람들도 곁을 지나친다. 아이의 손을 잡은 아버지도 아이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면 지나간다. 그렇게 수변산책로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좁은 길임에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갈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길 끝에서 만나는 여유

 

주인을 따라 수변산책로를 걸어 온 강아지 한 마리가 쉬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은 눈치다. 9개월이라고 하는 이 녀석 이름은 ‘아가’라고 한다. 이 녀석도 얼마나 더운지 털을 두 밀어버렸다. 그리고 저수지 둑 밑으로는 공원이 있다.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물이 보이는 곳에 두 사람의 남녀가 자리를 펴고 앉아 술판이 벌어졌다. 이 더위에도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변산책로 길이다. 7월 29일, 30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유로운 모습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수변산책로를 수원에서도 아름다운 길이라고 하는가 보다.

난 봄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답사 장소가 산으로 꼬리를 내닫고 있는 성곽이다. 유난히 봄이 되면 성곽을 즐겨 찾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또한 그 산 마루로 오르는 길에 아주 가끔은 정겨운 짐승들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찾는 산성. 우선은 평지에 쌓은 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찾는 이유는 또 있다. 평지에 쌓은 성에서 맛볼 수 없는 기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성 위로 난 길을 걷다가보면, 주변으로 달라지는 풍광에 빠져들게 된다. 그 풍광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삼년산성

 

산성을 걷는 즐거움

 

전국에 수많은 산성들이 그동안 복원이 되었다. 하기에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산성은 각각 그 산을 에워쌓고 있는 방법이 다르다. 하기에 산성을 걷다가 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왜 우리 선조들은 이런 형태의 성을 쌓았을까를 생각하다가 보면, 꽤 길이가 있는 산성임에도 언제 돌았는지 모르게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다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 땀을 산마루에 난 산성위에 올라앉아 식히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염되지 않은 산마루에서의 심호흡. 그것 하나만으로도 산에 오른 효과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가 이닐까?

 

 

위 단양 적성, 아래 고모산성

 

자연을 따라 자연이 되는 시간

 

우리 선조들은 성을 쌓을 때 자연을 이용한다. 산성을 걷다가보면 어느 한 구석 자연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 자연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산성이다. 그래서 그 산성이 곧 자연이다. 그 자연을 품고 걷다가보면, 나 스스로가 자연 안에 파묻히고 만다.

 

인위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느끼면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주변 곳곳에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성곽 틈사이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 위로는 샘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문이 생겨난다.

 

 

위 안성 죽주산성 아래 완주 위봉산성

 

그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얼마나 동화되는 삶을 살았는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산성 위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자연을 온통 뒤집어가며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 하나를 놓으면서도, 그 돌이 자연과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놓았다.

 

올 봄 산성을 걸어보자

 

올 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장관을 느끼고, 온통 꽃으로 덮이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걷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위 적성산성, 아래 홍주성

아름다운 산성 길. 가끔은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즐겁고, 산짐승 한 마리가 새로 난 풀잎을 뜯다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물 한 병 찔러 넣고 천천히 걷다가 보면, 그 산성 안에서 자연과 산성, 그리고 내가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동안 정말 그런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발을 씻으면서도, 이것은 당연히 내발이려니 하고 살았다. 당연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니 내 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오늘 왜 ‘발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달 타령이라면 혹 몰라도.

아마 나처럼 발을 혹사시킨 인간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 발은 위로 자그마치 작지 않은 키에, 몸무게도 만만치 않은 몸을 싣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그 발은 한 번도 나에게 불평을 한 적도 없다. 때로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나를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양말을 신었을 때는 정말 볼랐다.

알고 보니 무지하게 혹사를 시켰네.

누구에게 발을 보여 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 그저 답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찬물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피로를 조금은 풀기 위해 오래도록 주무른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루에 10km를 걸었다고 쳐도, 그 동안 걸었던 길은 모두 24,000km 정도라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이 계산은 이렇다. 답사를 나가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걷는 거리가 10km 정도이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걸을 수도 있고, 덜 걸을 수도 있다. 평균 잡아 한 달이면 10일 정도 답사를 한다. 그러면 한 달에 100km를 걷게 되고, 일 년이면 1,200km를 걸은 폭이다.

20년을 답사를 했으니 24,000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서울서 부산은 400km로 잡을 때 편도 60번, 왕복 30번을 걸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었다. 이런 발에게 한 번도 미안한 감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감사를 한 적도 없다.

더운 물에 담구고 주무르면서 보니, 정말 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붓고 굳은 살 박히고, 찢어진 것이

통증 때문에 바라본 발

갑자기 발에 통증이 온다. 양말을 씻기 전에는 벗지 않는 사람인지라, 늘 맨발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발에 통증이 오는 바람에 우연히 양말을 벗었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구고 주무르기라도 할 셈으로. 그런데 발을 보다가 놀랐다. 내 발이 정말 형편없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발톱은 그동안 산을 타면서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몇 번인가 빠지고 새로 돋았다. 그런 발톱이 제대로 생겼을 리가 없다. 주로 걸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동안 발을 혹사시킨 정도가 아니라, 고문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증이 오는 곳을 살펴보니 발 뒤꿈치다. 그것에 굳은살이 박여 터지고 피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심한 통증은 왔나보다. 그런데 그 발을 보면서 참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발을 보기가 미안스럽다. 아직 한 번도 발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본적도 없다. 그리고 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양말을 벗고 들여다본 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터지고 깨어지면서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발. 그 소중함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아파서 깨우친 것이다. 아마도 나를 깨우치기 위해 아픈 것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이 발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일까? 발을 보면서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발에게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적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나쁜 발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아서.

“발아 정말 미안하다. 그 동안 너무 혹사를 시켰나보다. 이젠 좀 쉬게 해주고도 싶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