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招仙)'이라 함은 신선을 초대한다는 뜻이다. 성남 경남 김해시 안동 685-1 에는 주변의 풍경에 어울리지 않은 곳이 있다. 바위와 숲이 우거지고 작은 정자와 암벽에 마애불이 있는 곳. 초선대는 그렇게 주변의 건조물들과 어울리지 않게, 속세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있다.

 

이 초선대에는 전설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옛 말에 이르기를, 가락국의 거등왕께서 칠점산의 담시선인을 초대했다. 담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이곳에서 바둑을 두며 함께 즐겼으니 이 때문에 이곳을 초선대(招仙臺)라고 하였다. 그때 왕과 선인이 앉았던 연화 대석과 바둑판 돌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칠점산(七点山)은 양산군 남쪽 44리 바닷가에 있으며, 산이 칠봉인데, 칠점과 같으므로 칠점산이라고 이름하였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거등왕은 김수로왕의 장남

 

가락국의 거등왕은 가야의 제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99~253년이다. 그런데 이 거등왕과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과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김수로왕의 첫째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했으니, 당연히 김수로왕의 아들일 것이다. 담시선인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칠점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이런 많은 류의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우리 역사 속에 무수히 많다. 그것이 당시의 집권세력들을 미화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신비주의로 인해 사람들의 위에서 군림하고자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마애불의 독특한 양식을 볼 수 있어

 

이 초선대의 암벽에는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마애불은 초선대의 암벽에 얕은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거등왕의 초상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소발의 머리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코, 두툼하고 넓은 입술 등은 당시의 지방에 조성된 마애불의 유형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경기도 이천 설봉산 영월암 마애여래입상과 같은 고려시대의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일련의 마애불 양식과 같은 맥락이다. 영월암 마애불이 부처이기보다는 나한이나 고승이라는 점과, 초선대마애불이 거등왕이라는 일설로 보아 당시 마애불 조성의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초선대 마애불의 몸 부분도 단순한 선으로 묘사되었다. 넓고 각이 진 어깨, 평행선의 옷주름은 형식화되어 신체의 양감을 살리지 못해 약간은 덤덤한 표현이다. 대좌와 광배는 마멸이 심하여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초선대 마애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마애불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선대의 비밀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가락국의 제2대 왕인 거등왕인지, 아니면 고려시대 마애불의 한 유형인 거대한 마애불을 바위에 새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밝히기보다는 그저 이 거대한 마애불 속에 담긴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피안의 세게로 인도하려는 부처의 마음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어차피 민초들이야 그 때나 지금이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테니 말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는 가야 제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산청은 원래 돌이 많은 곳이다. 산청에서 나오는 수석을 제일로 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돌무덤은 그동안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사지 설이 분분했던 곳이다. 이곳을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층계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감실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 왕릉으로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산청의 구형왕릉 무덤과(위) 구형왕릉 입구 정경


한 유생에 의해 확인된 구형왕릉

이 외에도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여 이 돌무더기를 왕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정조 11년인 1798년 이 왕산사기를 읽은 산청유생 민경원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왕산 기슭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중, 비를 만나 왕산사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왕산사기 수정암기와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녹슨 칼, 좀이 먹은 비단 옷, 활 등이 있어, 이 돌무덤이 수형왕릉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능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묵는 호능각을 들어가는 일각문과(위) 호능각


잡석을 이용해 쌓은 구형왕릉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형왕릉은 일반적인 봉토무덤이 아니다. 산청에서 많이 나는 돌을 이용해 비탈에 층단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석조무덤의 전체 높이는 7.15m로 비탈에 층단을 쌓고, 그 위에 둥글게 석조 봉분을 올린 형태이다.

이 구형왕의 릉 위로는 새가 날지 못하며, 나무뿌리와 심지어는 칡넝쿨도 뻗지 못한다고 한다. 8월 13일에 찾아간 구형왕릉. 관람객 몇 사람이 능에서 나온다. 능의 입구는 홍살문으로 하고 중간에 솟을삼문을 내었다. 그러나 그곳보다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두 개의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왕능을 지키는 ‘호능각’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누각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을 만난다.


능 앞에 서 있는 문무인석(반대쪽에도 서 있다)과 석비


잡석으로 쌓은 석조 능침 앞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양편에 문무인석, 그리고 상석과 장명등, 사자석이 있다. 이는 1957년과 1970년에 조성한 것이다. ‘양왕’이라는 이름은, 구형왕 12년 가락국 개국 491년 만에 신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 나라를 선양한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능 중간에 위치한 감실, 구형왕이 쉬어갔을까?

능 앞으로 가니, 그곳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안내판이 놓여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남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런 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능 중간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바로 커다란 돌을 이용해 만든 구멍이다. 이 구멍은 가로, 세로 40cm에 깊이가 68cm인 감실이라는 것이다.


잡석으로 비탈진 곳을 이용하여 층이지게 쌓은 구형왕능의 모습


이 감실의 용도는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등잔이 현재 능 앞에 조성된 장명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을 후손들은 ‘양왕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서 신성시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왕의 능을 찾은 김유신이, 이곳에서 7년 동안이나 능침 곁에서 시능살이를 하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증조부인 양왕의 서글픈 죽음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능 윗부분의 둥근 봉분과 중간에 나 있는 영혼이 쉬어간다는 감실


한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된 양왕.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으로 난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가 않는다. 역사 속의 아픔은 그렇게 세월 속에 묻히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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