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 현내면은 예전에 열산현의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현의 터는 화진포에 잠겨있지만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는 10여 개의 선사시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내면 송현리와 죽정리 등에서는 돌토끼와 민무늬토기 같은 청동기 유물이 발견이 되기도 했다.

 

이 현내면은 지역적으로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현내면은 명파리와 죽정리 등에서 신라고분 6기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현내면에는 고성산이라는 산이 산학리에 솟아있어,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적 요충지인 산학리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는 원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옛 운근리를 나누어 산학리(山鶴里)와 열산리(烈山里)로 구분했다. 고려 때는 열산현(烈山縣)의 소재지가 열산리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관제개혁으로 폐현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했으며, 현내면으로 개칭된 후 1915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두 부락의 '()'자와 '()'자를 따서 산학리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까지는 현내면 소재지이기도 하였던 산학리는, 마을 뒤편에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약 12m정도의 성지(城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쑥고개의 봉화봉에서 횃불로 신호하면, 이곳에서 간성 고성산으로 연락하였다고 한다. 이 성터를 산학리성터 혹은 고성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산학리의 지명을 보면 죽정리, 산학리 경계지점인 길모퉁이에 조선시대에 현령을 지낸 권모의 공덕비라고 전하는 비가 고송과 함께 남아 있어, 외솔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산학리에서 고성산을 끼고 화진포로 넘어가는 낮은 구릉에는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보이는데, 주둔군부대의 방호시설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옛 토성에 오르다.

 

23, 고성군 현내면의 2차 답사를 나섰다. 일행이 많아 두 대의 차량을 이용해 답사 길에 나섰다. 산학리에서 빠른 길로 화진포로 낮은 등성이를 넘다가 보니, 우측에 노송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소나무의 굵기로 보아 수령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모여 있어 그곳을 올라보았다.

 

 

석비 1기가 서 있는데, 그곳에 고성 산학리산성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앞면에는 산성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이곳은 옛날 이곳을 지키려는 선인들의 호국이 얼이 깃든 산성의 옛 터다. 처음 이곳에 성을 쌓은 시대와 성에 대한 내력은 전하는바 없어 자세하지 않으니, 고려시대 빈번하던 동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야 쌓은 산성이라 한다.

 

1033(고려 덕종 2) 이 고장에 침입한 왜구의 무리와 1217(고려 고종4)에 침입한 거란 무리를 이 산성에서 막아 싸운 곳이라 전한다. 세월이 가고 옛 성은 허물어졌으나, 향토를 수호하려는 이 고장 선민들의 얼이 깃든 호국유적으로 이를 보호하고자 표석을 세운다.

1984, 9 고성군수라고 적고 있다.

 

 

토성으로 쌓은 성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10m에 불과하다. 토성은 4~5m 높이로 경사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는 1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서 있는데 둘레가 족히 2m는 넘을 듯하다. 아마 이런 굵기를 본다면 이미 수령에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는 군부대의 방호시설이 있으며, 서쪽 끝부분은 문지나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축산성을 고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성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지나다가 들린 옛 성터. 2월의 바람이 불어온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표석이 없었다고 하면, 이곳이 성터인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옛 이야기라도 한 자락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인적 없는 옛 성터가 더욱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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