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어처구니 사라지고 취두만 남아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나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붕 위에 잡상도 이런 이유가?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 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창룡문과 화서문의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 일본인 학자들이 1902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을 답사하며 문화유적을 조사하였는데 당시에 찍은 사진에 보면 화서문의 지붕에 어처구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전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의 사진기록에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화서문의 현판이 기울어져 있고 지붕 위에 잡상(어처구니)도 보이지 않는다.

 

1940년 일본인 채색 목판화가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목판화의 화서문 역시 지붕 위에 어처구니를 그리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화서문 위의 어처구니는 1900년대 초 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화서문과 창룡문의 지붕 처마 끝에 각각 4구의 어처구니가 자리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팔달문 외도에 보면 1층 누각과 2층 누각 처마 끝에 각각 4기의 어처구니가 보인다. 현재 팔달문에는 어처구니가 서 있다. 하지만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 어처구니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하진 것일까? 더구나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정조대왕 때의 원형과 다르다. , 서문의 어처구니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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