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정조의 뜻 담겨있어

 

정조대왕이 도성의 궁을 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과 동작 - 사당 - 과천을 가쳐 수원으로 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노량진을 거쳐 시흥 -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향한 길이다. 그 당시 주로 행행을 하는 길은 사당 -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지만 동작에서 사당을 거쳐 과천의 길은 워낙 가파른 고개가 있어 어가행렬이 많이 지체되고는 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찾아가는 행행길을 한강 배다리를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행하는 길을 이용했다. 이 길에는 안양천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능행길의 다리는 목조로 가설했다가 왕의 어가가 지나면 다시 철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효심이 남다른 정조대왕은 부친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당시 경기관찰사인 서유방에게 안양천에 석교를 놓을 것을 명했고, 서유방은 안양천에 3개월의 공사 끝에 7개의 홍예가 있는 석교를 완성했다. 정조는 이 다리를 만안교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백성을 어여삐 여긴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라는 이름을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 만안교

 

12일 오후 안양으로 향했다. 안양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함이지만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안양천에 다리를 놓았다는 만안교(萬安橋)’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679 삼막천 위에 소재하고 있다.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를 건너 수원 화성행궁으로 오곤 했는데 이 다리는 석조로 조성했지만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만안교의 길이는 31.2m, 폭은 8m로 당시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말은 탄 기마병들이 지나기에 충분하도록 축조한 것이다. 현재 이 만안교는 1980냔 국도의 확장공사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460m 떨어진 안양교 사거리의 교차지점에 소재하고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안안교 곁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을 쓴 만안교비가 서 있다. 효심이 남다르던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내를 건너기 위해 축조했다는 만안교. 다리 위에 올라서면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진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얼마나 다니고 싶었으면 가교(假橋)인 목교가 아닌 단단한 셕교를 축조할 것을 명했을까?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돌다리 만안교

 

만안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교(무지개다리)로 알려져 있다. 만안교의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살펴본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하단부를 삼각형으로 조성한 돌을 유속방향으로 놓아 큰 물살에도 교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성하였다. 홍예를 받치고 있는 교각 역시 정교하게 조성해 짜임새가 독특하다.

 

상판에 놓은 석재도 큼직하게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하나하나가 정조대왕의 치밀함을 그대로 들어낸다. 화성을 축성할 때도 일일이 돌아보고 문제점을 해결하던 정조대왕이다. 백성을 아낀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 시 원래의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살폈던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만안교. 봄날 찾아간 안양시 소재 만안교에서 다시 한 번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는다. ‘만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다리혹은 모든 백성이 편안한 다리라는 만안교는 7칸의 홍예를 가진 아름다운 석교의 모습을 20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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