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의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백야라는 호를 많이 사용한다. 부유한 명문 출신인 김좌진 장군은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를 세웠다.

 

1911년 군자금 모금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김좌진 장군은,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박상진·채기중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하여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전념한다.

 

 

나라사랑으로 일관한 삶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39인에 가담한 장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낸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해내고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1928년 혁신의회 조직한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산시역의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 당한 장군은,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된다. 간략한 약력만 보아도 장군의 나라사랑이 어느 정도였는가 짐작이 간다.

 

나라를 위해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오직 조국의 안녕을 위해 몸 바쳐 온 김좌진 장군.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에 소재한 생가는 현재는 1992년부터 성역화 작업으로 인해 깨끗하게 정비가 되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구분이 되어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와가로 꾸몄다. 그저 평범한 시골집답게 꾸며진 이 생가는 남다른 것들이 있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함

 

집의 대문에는 <김좌진>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과 장독대가 보인다. 어느 집이나 있는 것이지만 무엇인가 색다른 느낌이다. 평생을 올곧은 정신으로 살다가 가신 김좌진 장군. 아마 그런 분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 모든 하나하나가 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집안을 둘러보다가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글귀 하나를 본다.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 청백리의 집안으로 팔백년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머리가 띵하다. 요즈음의 사람들 얼굴과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병역비리에 세금포탈, 거짓증언에 말바꾸기, 여기저기서 돈받아 놓고 오리발 내밀기. 서민생각은 추호도 하지않고 입으로만 서민 사랑하기 등의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과 각기 다른 주장들이 세상을 온통 벌집 쑤신 듯 시끄럽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당연하다는 것이요, 또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말살이라고 고함을 쳐댄다.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좀 배워라

 

오직 한평생 나라만을 생각하고, 팔백년이라는 긴 시간을 청백리의 집안이란 글을 남긴 김좌진 장군. 지금의 세상에 계셨으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세상이 보기 싫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시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불철주야 고민하고 스스로 행동을 하셨을까?

 

 

 

15세 때에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농토를 배분한 장군이다. 지금의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일침을 놓으셨을까? 집 장독대 곁에 쭈그리고 앉아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배불리 먹고 가득 쌓아놓고도 그것이 모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그 모습들을 보았다면, 아마 피눈물을 흘렸을 것만 같다.

 

소리 없는 고요. 평생을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오신 장군을 그린다. 한 낮의 해가, 그리고 바람이 통한의 상처를 어루만지 듯 지나간다. 장군의 정이 가득담긴 손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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